吳一島 生家(오일도 생가)와 詩碑公園(시비공원)

소재지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780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48호

DSC08892[吳一島詩碑 公園(오일도시비 공원) 전경]

본명은 熙秉(희병)이요 一島(일도)는 雅號(아호)이다.
吳時俊(오시준) 漆原 縣監(칠원현감)의 10세손이며 吳益休(오익휴)선생의
둘째 아들로서 光武(광무) 5년(1901) 영양면 甘川洞(감천동)에서 태어났다.

8세에 私淑(사숙)에서 6년간 한문을 배웠을때도 성적이 우수하였다.

DSC08888[吳一島 詩碑(오일도 시비]

1915년 3월 16세로서 뒤늦게 영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한 학년을 건너뛰어 1918년에 4학년을 졸업하고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응시 합격하여 입학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의 立敎(입교)대학 철학부에서 學究(학구)에 精進(정진)하는
한편 詩藝術(시예술)에 심취해서 1925년 문예월간지 朝鮮文壇(조선문단) 4월호에
처녀작 ‘한가람 白沙場(백사장)에서’를 발표하였다.

흰 갈매기 같은 우리 白衣民族(백의민족)이 모여 흰 빛을 발하던
한가람(漢江) 백사장을 갈가마귀 떼가(왜인들) 차지했으니
韓民族(한민족)의 恨(한)이 서린 詠嘆(영탄)은 다음과 같다.

[한가람 백사장은 흰 갈매기 놀던 곳 흰 갈매기 어디 가고 갈가마귀 놀단 말가.
橋下(교하)에 푸른 물은 依舊(의구)히 흐르건만 이처럼 변하였노]

IMG_2930a[시비에 적힌 저녁놀 전문]

IMG_2931a[시비 뒷편에 적힌 글]

8·15 직후 민족반역인 좌익분자들이 광복 조국을 어지럽힐 때에
救國(구국)의 뜻을 품은 선생은 민족 민주 진영인 韓國民主黨(한국민주당)에
입당했으나 이듬해인 1946년에 간경화증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2월 28일 맏아들의 가택에서 별세하니 향년 46세의 애석한 나이였다.

IMG_2920[오일도 생가]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민족적 양심을 저버리지 않은 지사이자,
항일시인인 一島(일도) 吳熙秉(오희병, 1901~1946)의 생가이다.
口자형 뜰집으로, 그의 祖父(조부) 時東(시동)이 고종 원년(1864)에 건축하였다.

IMG_2928a[안내판 글 내용]

IMG_2923[사랑채]

솟을대문을 가진 전면 대문간채는 정면 5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문간채를 중심으로 좌측에 글방이 있고 우측은 사랑채인데,
사랑방이 수평으로 연접되는 일도의 거처방이 수직으로 연결되어 우익사를 만들었다.

또한 사랑채는 전면 중간문과 우측면 샛문간에 의해 구분하여 놓았는데,
이는 우리의 유교적인 남녀유별 사상에서 동선 분리를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문간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방과 부엌을 두고,
좌측에는 외양간과 마굿간을 꾸몄다.

IMG_2924[사랑채 현판]

이 집은 크게는 正寢(정침)과 대문채로 되었다.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7칸의 ‘ㅁ자형 뜰집’이고 대문채는 ‘一’자형이다.
이 집은 조선후기 경북 북부지방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반가의 살림집 형태를 갖추고 있다.

DSC08882[사랑채 옆 안채 중문]

안채엔 선생님의 후손들이 살고 있기에…
들어가지는 않고 열린 대문쪽에서 사진만 찍어왔다.

DSC08884[안채]

IMG_2927[대문 밖 작은 화단에 핀 작약]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근화학교
[槿花學校 德成女中高의 前身]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었다.

1935년 2월 私財(사재)를 기울여 純粹時誌(순수시지) 詩苑(시원)을
創刊(창간)하여 조선문단의 시인들을 總網羅(총망라)하다시피 한 시 작품
발표기관의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시단에 끼친바 영향이 크다.

吳一島(오일도)시를 純粹 抒情詩(순수 서정시)라 일러,
荒凉(황량)과 凋落(조락)이 主調(주조)를 이룬 그의 시엔
민족의 얼과 정과 恨(한)이 스민 민족시인이기도 하다.

IMG_2921[대문 밖 작은 화단에 핀 작약 2]

오일도 시인의 高邁(고매)한 정신과 올곧은 절개는 끝내 변함이 없었다.

倭政末期(왜정말기)에 조선문인들 대다수가 懷柔(회유) 또는 억압당함으로써
왜정에 附同(부동)하는 親日文人(친일문인)으로 變造(변조)되었으나,
해방후 1966년 林鍾國(임종국)의 親日文學論(친일문학론)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그 가운데 너무나 많은 친일명사와 친일 무사들의 이름이 즐비하건만,
오일도시인의 이름은 그림자 조차 없으니 이역만리 쫓기는 신세이면서도
矮醜(왜추)앞에 屈從(굴종)하지 않은 절개있는 선비셨다.

오일도시인님의 대표시 몇편을 올려본다.

 

[爐邊(노변)의 哀歌(애가)]

밤새껏 저 바람 하늘에 높으니
뒷산에 우수수 감나무 잎 하나도 안남았겠다.

季節(계절)의 凋落(조락), 잎잎마다 새빨간 情熱(정열)의 피를
마을 아이 다 모여서 무난히 밟겠구나.

時間(시간)조차 約束(약속)할 수 없는 오오 나의 破鍾(파종)아
鬱寂(울적)의 夜空(야공)을 이대로 默守(묵수)하려느냐!

구름 끝 熱叫(열규)하던 기러기의 한줄기 울음도
멀리 사라졌다, 푸른 나라로 푸른 나라로ㅡ

고요한 爐邊(노변)에 홀로 눈 감으니
鄕愁(향수)의 안개비 자옥히 앞을 적시네.

꿈속같이 아득한 옛날, 오 나의 사랑아
너의 乳房(유방)에서 追放(추방)된 지 이미 오래라.

거친 비바람 먼 沙漠(사막)의 길을
숨가쁘게 허덕이며 내 心臟(심장)은 찢어졌다.

가슴에 안은 칼 녹스는 그대로
오오 路傍(노방)의 죽음을 어이 참을 것이냐!

말없는 冷灰(냉회)위에 秩序(질서)없이 글자를 따라
모든 생각이 떴다ㅡ 잠겼다ㅡ 또 떴다ㅡ

ㅡ앞으로 흰 눈이 펄펄 山野(산야)에 나리리라
ㅡ앞으로 해는 또 저무리라.

 

[눈이여! 어서 나려다오.]

눈이여! 어서 나려다오
저ㅡ 荒漠(황막)한 벌판을 희게 덮어다오.

차디찬 서리의 毒杯(독배)에 입술 터지고
無慈悲(무자비)한 바람 때없이 지내는 잔칼질에
피투성이 落葉(낙엽)이 가득 쌓인
大地(대지)의 젖가슴 포ㅡ트립 빛의 傷處(상처)를.

눈이어! 어서 나려다오
저ㅡ 앙상한 앞산을 고이 덮어다오.

死骸(사해)의 寒枝(한지) 위에
까마귀 운다
錦繡(금수)의 옷과 靑春(청춘)의 肉體(육체)를 다 빼앗기고
寒威(한위)에 쭈그리는 검은 얼굴들.
눈이여! 퍽 퍽 나려다오
太陽(태양)이 또 그 위에 빛나리라.

가슴 아픈 옛記憶(기억)을 묻어 보내고
싸늘한 現實(현실)을 잊고
聖域(성역)의 새 아침 흰 淨土(정토) 위에
내 靈(영)을 쉬이려는 希願(희원)이오니.

 

[五月 花壇(오월 화단)]

五月의 더딘 해 고요히 나리는 花壇

하로의 情熱(정열)도
파김치 같이 시들다.

바람아, 네 이파리 하나 흔들 힘 없니!

어두운 풀 사이로
月桂(월계)의 꽃조각이 幻覺(환각)에 가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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