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중앙대로 449
[지하 녹향 출입문]
1946년 문을 연 ‘대한민국 1호’ 음악감상실이다.
해방 이듬해부터 60년 넘게 운영 중인 이곳은 대구의 명물로 꼽힌다.
“녹향”은 1946년 이창수 선생이 SP 레코드 판 500여 장과
축음기 1대로 향촌동 자택 지하에 문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한다.
[녹향 이야기]
1950년 6월 25일 북으로부터 날아온 포성 하나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수많은 피난민을 낳았고, 그중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예술인들도 있었다.
그들이 피난민의 물결을 따라 흘러들어와 고인 곳이 바로 대구였다.
고단한 피난길에 잠시 모인 것이었지만
예술인들은 그들의 예술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예술혼들을 토한 마당 한 자락이 바로 녹향이었다.
전쟁 통에 마땅히 모일 공간이 없었던 시절,
그들은 녹향에 모여 다 같이 음악을 들으며 시를 쓰고
낭독회를 여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녹향 문을 열다]
[6.25 전쟁과 녹향 이야기]
[1960년대 녹향 이야기]
[2009년 위기를 맞다]
[2011년 창업자 이창수 선생 별세]
[녹향 변천사]
화가 李仲燮(이중섭, 1916~1956)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던 곳,
시인 趙芝薰(조지훈, 1920~1968), 柳致環(유치환, 1908~1967),
朴木月(박목월, 1915~1978), 朴斗鎭(박두진, 1916~1998) 그 외에도
아동문학가 馬海松(마해송, 1905~1966), 시인 具常(구상, 1919~2004) 등
셀 수 없는 예술인들이 작품을 울분 토하듯 쏟아내던 곳이 바로 녹향이었다 한다.
[녹향 내부 전경]
그중에서도 이창수 옹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예술인은 시인 楊明文(양명문, 1913~1985)이라 한다.
녹향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세월의 탓도 있지만 그 세월의 보답으로
‘명태’라는 글을 지어 가곡으로 만들고는 녹향 이창수 옹에게 바친다고 했다 한다.
그 시절 예술인들이 남긴 갖가지 일화와 흔적은
대구 문화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합니다.
[DJ BOX]
[창업자 고 이창수 선생]
[녹향 내부 전시된 자료]
현재는 향촌 문화관이 개관되면서 이곳 지하로 옮겨오게 되었다.
지금은 이창수 선생님은 돌아가시고 그 아들 분이 운영하고 있다 합니다.
[녹향 음악감상실]
이곳에서 신청한 곡을 감상할 수 있다.
[우측부터 김진균. 하대응. 권태호]
金晋均(김진균, 1925~1986)
대구 출신 작곡가, 음악학자로 대구사범학교 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작곡 및
서양음악사, 비교음악학을 전공 경북대학교 음악과 교수와
예술대학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가곡 ‘노래의 날개 위에’, ‘금잔디’를 작곡하고
1947년 한국적인 요소를 첨가한 ‘그리움’을 작곡했다.
그 외에도 많은 곡을 작곡하였다.
河大應(하대응, 1914~1987)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 음악 교사와 합창 지휘자를 거쳐 효성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진달래꽃’, ‘못잊어’, ‘초혼’, ‘나그네’ 등
다수의 가곡을 남겼으며 1963년에 ‘하대응 가곡집 I’,
1973년 ‘하대응 가곡집 II’, ‘산‘을 발표하였다.
權泰浩(권태호, 1903~1972)
安東(안동) 출생. 1910년부터 안동교회에서 선교사
부인에게 풍금과 피아노를 배우며 서양음악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일본 고등음악학교
(나카노(中野)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하였다.
작품으로는 작곡집 ‘국민가요집’ 외 ‘봄나들이’, ‘눈. 꽃. 새’·
‘대한 아기 행진곡’, ‘사향가(思鄕歌)’, ‘봄 오는 소리’, ‘결혼 축하의 노래’,
‘백합’, ‘승리의 노래’ 등이 있다.
총 200여 회의 독창회를 가졌으며, 국내에 처음으로 독일 가곡을 소개한
성악가로 서양음악 수입 후 우리나라 초기의 성악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크다.
[좌측부터 박태준. 현제명]
朴泰俊(박태준, 1900~1986)
대구 출생 기독교계 계성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전문학교 재학시 서양 선교사들에게서 성악과 작곡의 기초를 배워
‘가을밤’, ‘골목길’ 등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들은 동요의 초창기 작품으로 평가된다.
졸업 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우리나라 선구적 시인
李殷相(이은상)과 함께 ‘微風(미풍)’, ‘님과 함께’, ‘소나기’, ‘동무생각’,
‘순례자’ 등의 예술가곡 형태의 노래를 작곡하였다.
1924년에서 1931년까지 모교인 대구 계성중학교에 재직하면서
‘오빠 생각’, ‘오뚝이’, ‘하얀 밤’, ‘맴맴’ 등의 우리나라 동요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작곡하였으나, 이 가운데 윤복진의 작사에 곡을 붙인 50여 곡의 작품들은 윤복진의
월북관계로 1945년 이후 가사가 바뀌거나 또는 금지되기도 하였다.
민족 항일기 말에는 민족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玄濟明(현제명, 1902~1960)
대구 출생. 기독교 학교인 啓聖學校(계성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특히, 성악과 피아노에 관심을 가지고 음악수업에 열중하였다.
1930년대에 주도적인 성악가로서 활동하며 빅타와 컬럼비아
레코드 등에서 자작 가곡과 이탈리아 가곡 등을 취입하였다.
1933년에 洪蘭坡(홍난파)와 함께 한국 최초의 작곡 발표회를
가졌으며, 1932년과 1945년에 작곡집을 발간하였다.
195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가극 ‘춘향전’을 작곡, 지휘하고,
1958년에는 가극 ‘왕자 호동’ 등을 작곡하였다.
대표 작품으로는 가극 외에도 작곡집 제1집에 수록된 가곡
‘고향 생각’, ‘산들바람’, ‘그 집 앞’, ‘희망의 나라로’,
‘나물 캐는 처녀’ 등이 있다.
[蓄音機(측음기)]
[녹향 음악감상실 내부 전경]
향촌 문화관을 입장할 때 구입했던 표가 있으면 무료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표를 보자거나 들어오면 안 된다는 말도 없이 그냥 무사통과
직접 원하는 곡을 선정하여 신청할 수도 있습니다.
데레사
2018년 1월 29일 at 7:32 오전
부산에도 칸타빌례라는 음악감상실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노트를 들고 가서 필기도
했지요. 작곡자 작품번호 제목에서 부터 무슨
장조냐 까지 기록해가면서 응삭을 감상
하던 일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곳은 없어 졌습니다.
초아
2018년 1월 29일 at 7:24 오후
대구에는 이곳 말고도 참 많았습니다.
저도 많이는 아니지만, 친구랑 함께 가기도..
그 많든 음악 감상실이 거의가 다 없어졌어요.
명맥을 이어가긴 하지만, 활발하진 못한듯 하여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산고수장
2018년 1월 29일 at 10:44 오전
아~~ 지난날 많이도 다녔던
담배연기 자욱하고 젊음을 달랬던 그 록향이
지금도 있군요.
그러나 이렇게 진지한 역사는
모르고 다녔었는데…
감사합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 유념 합시다.
초아
2018년 1월 29일 at 7:28 오후
지난날 많이도 다니셨다구요.
음악 감상실은 조명도 어둠컴컴
그기에 담배연기까지.. 매케한 그곳이
음악이 좋아서 다녔지요.
저도 건성으로 다녔던 그 옛날 추억은 있지만,
녹향의 역사는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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