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 산 131-1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1호
[梁氏三綱門(양씨 삼강문) 전경]
광주시 광산구 박호동 박뫼마을 입구에는 전국 유일의
賜額(사액) ‘三綱門(삼강문) 지방기념물 제11호가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집으로,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1칸 규모의 일각문이 있다.
[梁氏三綱門(양씨 삼강문) 현판]
외삼문은 평삼문이며
‘梁氏三綱門(양씨 삼강문)’ 현판은 1803년 이헌중이 썼다.
[梁氏三綱門(양씨 삼강문)]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양산숙 일가
7명의 忠(충). 孝(효). 烈(열). 行(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旌閭(정려).
사액은 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扁額(편액).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
임금이 祠堂(사당), 書院(서원), 樓門(누문)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을 말한다.
[양씨 삼강문 안내판 글 내용]
[양씨 삼강문 표석비]
[三世九旌閭(삼세 구정려) 전경]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맹활약한 충민공 양산숙 의병장을
비롯한 충신과 효자. 절개를 지킨 열녀. 절부 등 7명을 1635년 인조의
특명에 따라 모시고 있다.
삼강문은 이들이 생전에 살았던 박뫼마을 앞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다.
[三世九旌閭(삼세 구정려) 현판]
[三世九旌閭(삼세구정려)]
梁氏三綱門(양 씨 삼강문)은 왜란이라는 전쟁으로
양반의 일가가 풍진박산이 나는 가슴 아픈 사연이 깃든 곳이다.
[三世九旌閭(삼세구정려)]
이들은 학포 양팽손의 후손들이다.
이곳은 의병장, 공조 좌랑 梁山璹(양산숙)을 위시로 할아버지는
己卯名賢(기묘명현) 증조부인 梁彭孫(양팽손)을 이어 대사성 梁應鼎(양응정),
양산용 선생, 거오제 양만용 선생 등 4대를 이어 ‘忠孝烈義(충효열의)’를
실천했다고 높이 추앙되고 있다.
그래서 박뫼 마을은 임진왜란부터 구한말까지
의병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忠(충)’의 고장으로 전국에서 명소로 알려졌다.
[효자 학생 양산수 지려]
삼양포에서 형 산룡과 함께 어머니를 구하려다 함께 순절하였다.
[열려 성균관 진사 김광운 처 양씨 지려]
김광운에게 출가한 양응정의 딸, 양산숙의 누이.
정유재란 때 삼양포에서 일본군과 만나 순결을 지키기위해 투신, 자결
[절부 증 자헌부부사 충민공 양산숙 처 정부인 이씨 지려]
절부 광산이씨 양산숙의 처로 정유재란 때
무안 승달산에서 왜적을 만나 항거하다가 자결하였다.
[절부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 양응정 처 정부인 박씨 지려]
副提學(부제학) 양응정의 처이자 양산숙의 어머니.
삼양포에서 일본군과 만나 아들, 딸과 함께 순절
[절부 김두남 처 제주양씨 지려]
양씨부인은 용당에서 왜구에 붙잡히자 가족들이 타고 있는 배를
피신시켜 가족들의 생명을 구하고 자신은 바다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효자 성균생원 양산룡 지려]
효자 양산룡 양산숙의 형으로 군량미를 모아 의병을 돕고
정유재란 때 피란하다가 삼양포에서 왜적을 만나 어머니
죽산박씨와 함께 바다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충신 증 자헌대부사 양산숙 지려]
양산숙은 김천일 장군을 도와 의병을 일으켜 강화도에 진을 친 다음
고경명 장군의 밀서를 가지고 의주행재소로 가서 선조에게 의병의 활동과
적의 동태를 보고 하였다.
1593년 6월 29일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성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절부 증 자헌대부사 양산수 처 정부인 이씨 지려]
절부 광산이씨 양산숙의 처로 정유재란 때
무안 승달산에서 왜적을 만나 항거하다가 자결하였다.
[三世九旌閭(삼세 구정려) 전경]
이곳에 모신 분은 충신 양산숙 외에 효자. 열녀. 절부 각 두 명씩이다.
[三世九旌閭(삼세구정려) 쪽에서 담은 일각문]
1635년 인조 13년에 9명을 포상하라는 왕명이 내려졌으나
진사공 양산룡의 부인 고흥유씨와 김두남의 처 제주양씨가 제외된 채
시간이 흐르면서 삼세칠정려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2명의 행적과 승정원일기를 발굴해 양씨삼강문에
2명을 추가 배향하고 일문삼강 삼세구정려의 현판을 새롭게 봉안했다 합니다.
[의병장 양만용의 어등산 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서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梧齋(오재) 양만용(1598~1651)은 자신의 고향인 어등산 아래 박산마을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빈집의 잠자리가 차가워 문득 깨워보니
븨를 보내는 높은 바람 소리 처마 끝에 울이네
우짖는 까마귀는 새끼 데리고 안개 낀 숲으로 들어가고
새들은 둥지를 찾아 난간으로 들어오네
창 그림자는 점점 달그림자 따라 돌아가고
벌레소리 도로 이어지고 빗소리 그쳐가네
황룡강의 물과 돌, 어등산의 정취가
밤마다 또렷이 꿈속에서 보이네(옮겨 적음)
[만사 서경우 시]
[박뫼마을(박산)]
[제주양씨삼강전 비 전경]
[제주양씨 삼강전 안내글]
[제주양씨삼강전 비 와 우측 양씨 삼강문 전경]
[제주양씨삼강전 쪽에서 담은 안내 팻말과 양씨 삼강문 앞쪽 도로 전경]
[다시 담아 본 양씨 삼강문과 제주양씨 삼강전 비 전경]
제주 양씨의 자랑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忠(충). 孝(효). 烈(열). 모두가 좋지만,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서 부강한 국가를 이루어야겠습니다.
데레사
2018년 6월 18일 at 9:15 오전
다시 힘을 모아 부강한 나라를…
존재조차 불안하기만 하네요.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옛 선인들을 조금이라도 본받았으면 합니다.
초아
2018년 6월 18일 at 8:49 오후
어려울 때일수록 위기를 느낄수록
힘을 합하는 우리 민족 그 민족의 끈기로
극복해 나가며, 부강한 국가를 이룰 수 있도록
마음으로 기도하며 믿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