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광주광역시 대촌동
[고씨 삼강문 옆 문중 제각 追遠閣(추원각) 전경]
[承訓門(승훈문) 현판]
[承訓門(승훈문)]
제봉의 뜻을 후손들이 길이 이어가라는 뜻인듯….
[좌측 옆쪽에서 담은 追遠閣(추원각) 전경]
추원각의 정문인 승훈문은 닫혀 있었지만,
다행히 옆으로 돌아 오니, 담과 담 사이를 넗게 뚫어놓아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두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담아왔습니다.
[입구쪽에서 담은 追遠閣(추원각)과 承訓門(승훈문) 전경]
[追遠閣(추원각) 현판]
[追遠閣(추원각)]
[世篤忠貞(세독충정) 편액]
世篤忠貞(세독충정)이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항상 나라에 충성하고 올바른 마음을 굳게 지녀야 한다.’
는 뜻으로 제봉의 좌우명이었다 한다.
[추원제 협문]
추원제 협문을 지나면 곧장 고씨 삼강문쪽으로 이어진다.
협문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 지붕이 바로 고씨 삼강문이 자리하고 있으며
고씨 삼강문과 추원재 뒤쪽 고원희 가옥 옆 낮은 둔덕에는 고맹영의 묘가 있다.
고경명 장군이 고운의 아들이자 부친인 고맹영의 묘를
현재 삼강문이 있는 쪽으로 모시면서 집터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잡았다.
고씨 삼강문은 소개를 해 드렸으니,
오늘은 고맹영의 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묘 뒤쪽에서 담은 고맹영 부부 묘 전경]
묘소를 오르기위해 추원각에서 다시 고원희 가옥쪽으로
고원희 가옥 옆 앝은 둔덕으로 조금 오르면 고맹영 부부 묘가 보인다.
[묘 뒤에서 담은 고맹영 부부 묘 전경]
장흥백 9세손 의정공 휘 맹영, 배 증 정부인 남평서씨 묘.
고맹영 선조의 바로 뒤편에 정부인의 묘소가 일렬로 있다.
[정면에서 담은 고맹영 부부 묘 전경]
본관 長興(장흥). 자 英之(영지), 호 霞川(하천).
高尙志(고상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 증 공조참의 高自儉(고자검),
아버지는 형조좌랑 高雲(고운)이며, 어머니는 李好善(이호선)의 딸이다.
[정면에서 담은 고맹영 부부 묘 ]
중종 35년(154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명종 1년(1546) 예조좌랑이 되었다.
다음해 사헌부감찰이 된 뒤, 1550년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을 거쳐
다음해 特旨(특지)로 옥천군수가 되었다.
1553년 폐단을 제거하고 선정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상석과 묘비와 묘]
1558년 兩司(양사)의 장령. 헌납. 집의. 사간을 거쳐,
1560년 世子侍講院輔德(세자시강원보덕)으로 加資(가자 : 관직이나 품계가 오름)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
[묘비와 묘]
李樑(이량)의 당여(黨與 : 정치적인 식견을 같이함)로서
항상 측근에 있고 싶어하였다.
이량이 평안감사에서 내직으로 들어오자,
자신도 병을 핑계로 내직으로 들어왔다.
[묘앞쪽에서 담은 전경]
1562년 첨지중추부사. 동부승지. 대사간. 홍문관부제학.
병조참의. 이조참의. 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묘쪽에서 담은 아랫쪽 고씨삼강문과 추원각 전경]
이듬해 양사에서 이량의 당여를 탄핵할 때,
고맹영도 유배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이후 거듭
탄핵을 받다가 1565년 이량의 실각과 함께 유배당하였다.
부인 南平徐氏(남평서씨)는 徐傑(서걸)의 딸이다.
슬하에 1남을 두었는데, 아들은 의병장 高敬命(고경명)이다.
데레사
2018년 6월 20일 at 7:28 오전
묘소가 잘 관리되고 있네요.
깨끗하기도 한데 늘 누군가가 돌보나 봅니다.
광주를 다 다녔으니 다음에는 어디로
가시나이까?
초아
2018년 6월 20일 at 9:52 오후
예, 묘소와 가까운 곳에 고원희 가옥이 있습니다.
그곳에 거주하시는 후손께서 잘 관리하고 있는것 같았어요.
광주 아직 멀었어요.못 가본 곳도 많지만,
다녀온 곳도 아직 소개를 덜 하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