芬皇寺模塼石塔(분황사 모전석탑)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2
국보 제 30호

20190126_113739[분황사 안내석 碑]

芬皇寺(분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으로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편성되어 있다.

20190126_112631[주차장에서 담은 분황사 전경]

오래전 왔을 때는 정문이 아닌 우측에 보이는
작은 붉은 색 작은 협문으로 들어갔는데, 이번엔 정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게 개방해 놓았다.

20190126_112718[매표소와 분황사 삼문]

매표소에서 표를 받아(경노 무료) 들어가면서
앞쪽 안내판을 담으려 하였는데, 사진을 찍을 때 없었던 사람들이
분황사 구경을 마치고 나오며 안내판 앞에 서서 안내글을 읽느라
서너명이 돌아가며 읽는지 비켜줄 생각이 없는듯 하여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
담아야지 했지만, 고단새 까먹고 그냥 집으로 ….

20190126_112743[삼문쪽에서 담은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이다.
석탑의 모양은 구운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전탑처럼 보이지만,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전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模塼石塔(모전석탑)이라 불린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基壇(기단) 위에 3층의 塔身(탑신)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20190126_112832[분황사석탑비와 보물제30호 분황사석탑 碑]

20190126_112840[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안내판 글 내용]

이 석탑은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라 善德女王(선덕여왕) 3년(634)에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模塼石塔(모전석탑)이다.
기단의 규모나 탑의 형태로 보아 7층이나 9층이었을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 일본인이 허물어진 것을 해체. 수리하였다.
1층 몸체돌의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龕室(감실)이 있고, 감실 양쪽으로 佛法(불법)을
지키는 仁王像(인왕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자연석으로 된 기단 위에는 네 마리의 石獅子(석사자)를 배치하였다.
탑에서 나온 돌 舍利涵(사리함)에는 여러 가지 구슬, 가위, 금. 은바늘과
은함, 崇寧通寶(숭령통보) 常平五銖(상평오수) 등이 들어있어, 고려 肅宗(숙종).
睿宗(예종). 연간에 해체. 수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안내판 글 내용 옮겨 적음)

anigif0[탑 사방 으로 감실과 감실을 지키는 인왕상 애니메이션 편집]

탑의 각 부분에는 석문이 달린 감실이 있다.
東(동). 西(서). 南(남). 北(북) 방향으로 출입문을 만들어 놓았으며,
출입문 양쪽에는 금강역사를 새겨 놓은 인왕상이 있다.

감실은 불상 신주 또는 기타 여러 가지 물건을 봉안하기 위한
공간을 줄여서 龕(감)이라고도 한다.

page[모전 석탑을 지키는 石獅子(석사자)]

page-2[모전 석탑을 지키는 石獅子(석사자)]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190126_113019[좌측에서 담은 芬皇寺模塼石塔(분황사 모전석탑) 전경]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세워진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불교가 크게 중흥했던 신라의 전성기와 함께 한 사찰이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 간 절이다.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華嚴經疏(화엄경소)’, ‘금광명경소’
수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神畵(신화)로 일컬어졌다.

원효 사망 후에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한다.

원효의 뼈를 부수어 만들었다는 이 소상은 고려 시대까지 분황사에 남아 있었으며,
일연이 ‘三國遺事(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있었다고 한다.

* 소상 : 정제한 점토로 만든 형상

20190126_113009[분황사 모전석탑 우측 뜰]

분황사의 芬(분)은 향기롭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皇(황)은 황룡사, 황복사, 황성사 등에서와 같이 신라왕실의
원찰을 의미하는 상징어이기도하며, 皇(황)은 임금을 뜻하는
임금 王(왕)과 같은 의미이므로 분황사는 ‘향기로운 임금의 절’
이라는 뜻이라한다.

고려 말 몽골 제국의 침략과 조선 시대의
임진왜란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지고 임진왜란 이후에
세워진 보광전 전각이 남아 있다.

20190126_113102[분황사 담 옆 석재]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이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석재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anigif[애니메이션 편집]

언젠가는 저 석재들이 다시 빛을 발하게 될 날이 있겠지요.

20190126_113229[석탑 동편의 碑(비)]

20190126_113244[芬皇寺模塼石塔(분황사 모전석탑) 전경]

신라의 향가 ‘도천수대비가’의 배경에는 분황사가 등장한다.
분황사에 걸려 있던 千手大悲(천수대비)의 그림에 영험이 있었다한다.

경덕왕 때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20190126_113256[芬皇寺(분황사) 和諍國師碑趺(화쟁국사비부) 전경]

20190126_113309[분황사 화쟁국사비부 안내판 글 내용]

20190126_113303[芬皇寺(분황사) 和諍國師碑趺(화쟁국사비부)]

화쟁국사비적은 원효의 비석을 받치던 비적으로 김정희의 글이 새겨져 있다.

20190126_113404[普光殿(보광전) 전경]

신라시대 사찰인 분황사 경내의 법당으로
현재 분황사의 대웅전 구실을 하고 있는 전각.
보광전에는 약사여래입상과 원효대사 진영이 있다.

20190126_113329[분황사 石井(석정) 전경]

20190126_113348[石井(석정)]

우물인 삼룡변어정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신라 원성왕 때의 호국룡 이야기에서 무대가 되는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가서
빼앗아 왔다고 한다. 그 뒤 이 우물을 삼룡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한다.

이 우물은 외곽 바탕은 사각으로, 우물 외부는 팔각으로,
내부는 원으로 설계되어 철학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석정은 신라샘의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초석의 규모로 보아 당시에는 대단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수 있다.

20190126_113412[大鐘閣(대종각) 전경]

20190126_113532[大鐘閣(대종각) 현판]

20190126_113520[大鐘閣(대종각)]

20190126_113459[大鐘(대종)]

분황사 대종각은 용도는 절에서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시각을 알리기 위하여 치는 종.

사찰에는 사물이라는 소리를 내는
공양구가 있는데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다.

소리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구제해 보고자 하는 대승불교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한다.

20190126_113601[芬皇寺模塼石塔(분황사 모전석탑) 전경]

6세기에 먼저 지어진 황룡사와는 담을
마주하고 바로 옆에 건축되어 황룡사지와 잇닿아 있는
분황사 소개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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