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역사관(2실 황금의 나라, 신라)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76

20190126_121014[2실 황금의 나라, 신라 출입구]

20190126_121028[2실 황금의 나라, 신라 안내도]

20190126_121021-1[황금의 나라, 신라 설명 글 내용]

20190126_121128[금관총 금관 발견 안내 글 내용]

20190126_121149[金冠塚(금관총)]

1. 金冠(금관)
2. 드리개
3. 유리 구슬
4. 가슴걸이
5. 옥
6. 팔찌
7. 금 허리띠와 꾸미개
8. 금동 신발

20190126_121045a[앞쪽에서 담은 경주 금관총(신라 5세기)]

20190126_121112[뒷쪽에서 담은 경주 금관총(신라 5세기)]

20190126_121237[전시실 내부 전시된 여러 종류의 출토 유품]

20190126_121225a[전시실 내부 전시된 여러 종류의 출토 유품]

20190126_121208a[전시실 내부 전시된 여러 종류의 출토 유품]

20190126_121217[皇南大塚(황남대총)]

20190126_121313[신라 왕릉, 황남대총 설명 글 내용]

실크로드를 거쳐 온 물품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 끝에 자리하였으나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발전하였습니다.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 사실을 보여주는 이국적인 물품에는 수입품도 있고
외래의 영향을 받아 신라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것도 있습니다.

지중해 연안이나 중앙아시아 등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만들어진 물품이 어떤 연유와 경로로 신라까지 전해졌을까요?

초원길과 비단길, 바닷길 등을 통해 신라는 머나먼 지역과
교류하거나 정보를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특히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리그릇은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만 확인되었습니다.

20190126_121256a[뿔잔]

뿔잔은 소나 양 등의 뿔을 이용하여 만든 잔으로
초원지대에 살던 유목민들이 즐겨 썼다고 합니다.

그리스어로는 라톤이라고 하며 그리스, 로마,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뿔잔은
삼국시대부터 보입니다.
대체로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의 영향을 받았던 지역에서 확인됩니다.

신라의 뿔잔에는 신라인의 토기에 장식하던 무늬가 새겨져 있거나,
뿔잔의 받침대가 신라의 굽다리접시 다리 모양을 하고 있어 신라화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190126_121301-2-vert[장식보검 / 보물635호]

경주 계림로 14호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원래는 꼭지가 달린 자루나 칼집에 나무가 부착되어 있었지만 썩어서 없어졌다.

칼집과 자루에는 얇은 금판을 전면에 입히고, 다시 작은 금판을 세워 붙여
물결, 나뭇잎, 원, 타원, 태극무늬 등을 만들어 조합시켰다. 이러한 무늬에는
붉은 마노와 재질을 알 수 없는 보석이 박혀있다.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무늬의 아름다움과 함께 보석의 붉은빛과
잿빛 및 금판의 금빛이 어우러져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20190126_121306[유리그릇]

고대 사회에서 유리는 황금에 버금가는 귀중한 재료였습니다.
유리그릇은 최상의 교역품이었으며, 신라로 전해진 대부분의
유리그릇은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제작된 로마 유리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리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라 유리그릇은 지금까지 25개가 확인되었는데 금관이 출토된
황남대총과 서봉총, 금관총, 금령총, 천마총에도 모두 유리그릇이
부장되어 죄상의 위세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서 7개, 북쪽 무덤에서
4개의 유리그릇이 출토되었습니다.

20190126_121322[전시된 여러 종류의 출토 유물]

20190126_121330[皇南大塚(황남대총)]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 묻힌 이는 금허리띠와 화려한
큰 칼을 차고 있었는데, 금관이 아닌 금동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몸에는 금과 옥으로 만든 여러 장신구를 둘렀고, 머리맡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놓여있었습니다. 비단벌레로 장식한 금동제허리띠,
금동제팔뚝가리개 등은 널[棺관] 뚜꺼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널 바깥 안쪽 석단에서는 젊은 여자의 치아와 두개골 일부가 나왔는데
저승에서 마립간의 시중을 들 소녀를 함께 묻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20190126_121335[전시실 내부 전시된 출토 유품]

20190126_121340[전시실 내부 전시된 출토 유품]

20190126_121348[고리자루큰칼 / 신발 / 신발복원품]

20190126_121406a[금동 관모. 관모장식]

20190126_121358-1-vert[허리띠와 꾸미게, 금동 관모, 관모장식]

20190126_121351[팔뚝가리개(보물 제632호)와 허리띠]

팔뚝가리개(보물 제632호) :

가운데 부속은 팔뚝을 보호하며, 팔꿈치 쪽이 넓고 팔목 쪽이 좁다.
이 부속에는 중심선을 따라 꽃봉오리 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팔목을 감싸는 부속은 가운데 부속의 양쪽에 경첩으로 달았으며,
팔목 안쪽에서 끈을 걸어 채울 수 있도록 나란하게 세 개씩 걸이를 달았다.

갑옷의 부속인 팔뚝가리개는 신라의 무덤에서 금동제, 은제, 철제가
출토되었으며, 그 모양이 대체로 비슷하다. 경주 계림로 14호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원래는 꼭지가 달린 자루나 칼집에
나무가 부착되어 있었지만 썩어서 없어졌다.

칼집과 자루에는 얇은 금판을 전면에 입히고, 다시 작은 금판을 세워
붙여 물결·나뭇잎·원·타원·태극무늬 등을 만들어 조합시켰다.
이러한 무늬에는 붉은 마노와 재질을 알 수 없는 보석이 박혀있다.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무늬의 아름다움과 함께 보석의 붉은빛과
잿빛 및 금판의 금빛이 어우러져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20190126_121414[마립간을 위해 온갖 재물을 채우다]

황남대총 남쪽 무덤의 주인인 마립간을 위해 커다란 딸린덧널을
설치하고 온갖 재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 창고를 가득 채운 수많은
물건은 마립간이 가진 권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군사력을 드러내는 무기, 생산력을 보여주는 농. 공구, 경제력을
나타내는 덩이쇠,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토기는 마립간의 특별한
지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음식이 가득했을 큰 항아리는 45점이 있습니다.
철제 무기로는 큰칼, 창, 화살촉 등이 있고, 농공구는 삽날돠 소스랑
등이 있습니다. 덩이쇠는 10배의 배수 단위로 묶어서 최소 1,330개를 넣었습니다.

큰항아리 위에는 말을 부릴 때 쓰는 여러 가지 연장이나 말에 딸린
꾸미개, 그릇 등을 켜켜이 쌓았습니다. 말갖춤은 적어도 7벌을 넣었는데
금동이나 은 등 귀금속으로 꾸민것도 4벌이나 있습니다.

20190126_121422[황남대총 남분에 묻힌 사람은 누구일까]

황남대총 남쪽 무덤은 지름이 80m에 달하는 신라 무덤 가운데서도
초대형입니다. 무덤을 축조한 때는 대략 5세기 전반 또는 중반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에 해당하는 마립간으로는 나물마립간(재위 356~402),
실성마립간(재위 402~417) 눌지마립간(재위 417~458)이 있습니다.

세 마립간 가운데 한 사람이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지만, 현재로서는 구구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습니다.

20190126_121436[경주 황남대총 남분 유물]

20190126_121501[경주 황남대총 남분 유물]

20190126_121509a[경주 황남대총 남분 유물]

20190126_121517a[경주 황남대총 남분 유물]

20190126_121544[경주 천마총 / 금관(국보 제188호) / 금 허리띠와 꾸미개]

신라의 황금문화

오랜 시간 변치 않고 빛을 발하는 金(금)은 예로부터 영원함과
고귀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마립간이 통치하던 5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신라는 고대 국가로서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고
이 150년간의 신라 항금문화의 전성기였습니다.

冠(관)을 비롯하여 허리띠, 귀걸이, 팔찌, 반지, 목걸이 등 각종
장신구뿐만 아니라 무기와 말갖춤, 그릇 등을 만드는데 금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각종 금제품을 무덤안에 함께 넣어 죽은 이의 영원한 안식과
내세에서의 고귀한 삶을 기원하고, 한편으로는 죽은 이의 장례를 치르는
산자의 위세를 나타냈습니다.

20190126_121550[경주 천마총 / 금관(국보 제188호) / 금 허리띠와 꾸미개]

20190126_121614[귀걸이]

20190126_121622[전시실 내부 전시된 유물]

20190126_121636[天馬塚 冠帽(천마총 관모) / 국보 제189호]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 때 모자이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으로 만든 冠(관) 안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각각 모양이 다른 금판 4매를 연결하여 만들었다.

금관과 함께 지배자를 상징하는 위세품의 하나이다.
이 관모는 모자 모양이기는 하나 머리에 쓰기에는 작기 때문에
가죽 혹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모자의 윗부분을 장식한 용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20190126_121644[관꾸미개 / 金製冠飾(금제관식) / 보물618호 / 보물 617호]

보물 제618호 :
천마총 금제 관식은 새가 힘차게 날개짓 하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좌우대칭의 형태로서 날개를 표현한 부분과 정면의 굴곡 부분으로 구분된다.

보물 제617호 :
1매의 얇은 금판을 좌우대칭으로 도안을 그린 후 오려 만든 관식으로서
관모의 앞부분에 꽂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외모는 조익형 관식과는
다르게 새 날개에 해당하는 부분이 나비 모양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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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_121658[금동 말안장꾸미개]

20190126_121709[가슴걸이 / 보물 제619호]

무덤 주인의 가슴 부위에서 출토되었다.
가슴 쪽은 U자형으로 늘어뜨리고, 양끝의 일부는 등 뒤로 넘겼다.

푸른빛의 둥근옥과 속이 빈 금제 구슬을 이어서 여섯 줄로 엮고,
네모기둥 모양의 금장식을 중간에 넣어서 가슴 쪽은 다섯 줄,
등 쪽은 세 줄이 되도록 고정하였다.

가슴 쪽과 등 쪽 끝에는 벽옥제 곱은옥을 각각 한 점씩 매달아 장식성을 높였다.
이와 같은 가슴걸이는 신라 지배계층의 상징적인 껴묻거리[副葬品]로 많이 애용되었다.

20190126_121719[천마총, 절정을 이어가다 설명 글 내용]

20190126_121724[대관 / 모관 / 관식 / 설명 글]

20190126_121724a-1[臺冠(대관) / 천마총 / 황남대총]

20190126_121724a-2[帽冠(모관) / 금관총 / 황남대총]

20190126_121724a-3[冠飾(관식) / 금관총 / 황남대총]

20190126_121730[금관과 설명 글]

20190126_121730a-1[교동 / 황남대총 북분의 출토 유물]

20190126_121730a-2[금관총 / 서봉총 출토 유물]

20190126_121730a-3[금령총 / 천마총 출토 유물]

금관이 나온 신라의 능묘

신라 금관은 지금까지 모두 6점이 발굴 또는 발견되었습니다.
1921년 금관총에서 금관이 처음 출토된 뒤, 1924년 금령총, 1926년 서봉총
1973년 천마총, 1974년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 잇따라 발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2년에는 경주 교동의 한 무덤에서 문화재를
노린 도굴꾼에 의해 초기 형태의 작은 금관이 발견되었습니다.

가장 오랜 금관은 둥근 금테 위에 1단으로 된 나뭇가지모양 장식을
3개 세운 간소한 형태로 교동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의 금관은 나뭇가지모양 장식이 3단으로 5세기대의 금관들입니다.

6세기시대의 금령총. 천마총의 금관은 나뭇가지모양 장식이 4단으로 바뀌며 더욱 화려해집니다.

이곳에 적은 설명 글 등은 대부분 경주박물관 홈에서나
아니면 2전시실 내부 안내 글을 옮겨 적은 글입니다.
2전시실 소개를 마칩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9년 3월 5일 at 9:34 오전

    신라가 멸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면 나라 전체가 예술품이 되어 있을겁니다.
    이따긍 이런 상상을 해보며 웃습니다. ㅎ

    • 초아

      2019년 3월 5일 at 9:10 오후

      아마도 그랬갰죠.
      유물에 묻혀서 이 나라 전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 되었겠죠.ㅎ

      그러나 어떤것도 영원한 것은 없으니..
      지나간 것도 그리워하며 앞으로의
      세상도 꿈꾸어 보는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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