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의 영수 金孝元(김효원) 묘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226

20190419_114421[좌 아버지 金弘遇(김홍우) 신도비 / 우 성암 金孝元(김효원) 묘갈]

동인의 영수였던 성암 김효원의 묘소 아래쪽 마을
입구에는 아버지 김홍우 신도비와 성암 김효원 묘갈이 세워져 있다.

20190419_114437[성암 金孝元(김효원) 묘갈]

묘갈은 무늬가 없는 백색의 받침돌에 화강암의
碑身(비신)과 팔작지붕 형태의 뚜껑돌을 올렸다.

순조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許穆(허목)이 글자를 썼다.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보이지 않는다.

20190419_120126[아랫쪽 에서 담은 묘역 전경]

신도비와 묘갈이 있는 곳으로는 올라갈 길이 보이지 않아
마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지만, 묘소로 통하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되돌아 신도비와 묘갈이 있던 곳으로 왔지만, 오르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묘갈 뒤쪽으로 길은 아니지만, 올라가면 오를 수 있을것 같아서…
수풀을 헤치며 비탈진 길을 오르는 나에게 남편은 길이 아니니 위험하다며
오르지 말라 소리한다.

20190419_115132[동인의 영수 성암 김효원 묘역 전경]

사실 너무 가파른 곳이라 내려올 때를 생각하니 무작정 오를 수는 없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결국은 묘소가 보이는 둔덕 위까지 올랐다.
위험해서 어떻게 내려가지 하는 생각은 뒤로 미루고 우선 묘역부터 담기 시작하였다.

20190419_115148[맨 앞쪽 묘 2기]

이 묘군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도시개발로 인해 2000년 경 이장하여 한 곳으로 모셨다 합니다.

앞쪽 두기의 묘는 어느분이 묘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후손의 묘일것 같네요.

20190419_115221[좌 아버지 김홍우 묘 우 성암 김효원 묘]

맨 앞쪽으로 좌측이 아버지 김홍우 묘
우측이 성암 김효원 묘라 합니다.

20190419_115242[성암 김효원 묘]

 

省庵 金孝元(성암 김효원, 1542~1590)
본관 善山(선산), 자 仁伯(인백), 호 省菴(성암)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다.

명종 19년(1564)의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바로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565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였다.

淸議(청의)를 주장해 사림으로부터 선명성을 인정받아 일약 동인의
領袖(영수)로 받들어졌던 그는 정작 宦路(환로, 벼슬길)에서는 집중적인
견제를 받아 지방을 떠돌다 3품직으로 막을 내렸다.

조정에서 분당이 생기자 늘 낙향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어머님 때문에 결행하지 못하고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0190419_115257[성암 김효원 묘 주변 전경]

봉분 앞에는 무늬가 없는 직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놓인 月頭形(월두형)형의 묘표가 있다.
정계부인 초계 정씨와 합장묘이며, 묘소에는 묘표, 魂遊石(혼유석), 床石(상석), 長臺石(장대석),
香爐石(향로석), 望柱石(망주석), 文人石(문인석) 등이 있다.

20190419_115251[아버지 김흥우의 묘]

아버지에 대해선 검색을 해도 찾지 못하여 조부, 증조부,
5대조, 6대조, 7대조 그 윗대의 묘에 관해서는 담아온 사진만 올립니다.

 

20190419_115308[우측에서 담은 성암 김효원 / 아버지 김홍우 묘 전경]

그 대신 검색을 통해 알게된 성암 김효원에 관하여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190419_115313[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전경]

20190419_115318[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전경]

망주석 앞 좌우에는 동자석 형태로 홀대가 없는 문인석이 있다.

20190419_115326[성암 김효원 묘표]

page[망주석]

망주석은 꽃잎이 위로 향하는 꽃모양이 조각되어 있으며 팔각형의 받침대에 놓여 있다.

20190419_115349[좌 증조 김수현 묘 / 우 조부 김덕유 묘]

그 뒤 병조좌랑. 정언. 지평을 지냈으며 사헌부 지평으로 재직 중
문정왕후 윤씨가 죽고 척신계가 정계에서 몰락하면서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신진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20190419_115402[우측 문인석]

선조 7년(1574) 이조전랑으로 있던 吳健(오건)이 자리를 옮기면서
이조전랑으로 그를 추천하였으나 과거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沈義謙(심의겸)이 강하게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20190419_115406[좌측 문인석]

그러나 그는 외척도 아니고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심의겸의 반대를 견뎌내고 이조전랑이 되었다.
또한 그는 심의겸이 외척으로 그의 집안이 윤원형의 집안과 인척이고
가까이 왕래한 것과, 심통원의 부패, 비리를 지적하며 공격하였다.

20190419_115411[조부 김덕유 묘]

1574년 이조전랑을 지냈고 이듬해인 1575년 심의겸의 동생
沈忠謙(심충겸)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전랑의 관직은 절대로 척신의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

이후 그는 심의겸과 심충겸을 외척이라며 비난하였고, 선조가 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한 것과 같으므로 그의 주장이 공론으로 받아들여졌다.

20190419_115439[조부 김덕유 묘표]

김효원을 지지했던 사림으로는 김우옹, 류성룡, 이산해, 정구,
허엽, 임제, 이발, 정지연, 우성전, 정유길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개 이황, 조식의 제자들과 화담 서경덕의 문인과 손제자들이었다.

20190419_115419[증조 김수현 묘]

이들을 동인이라 하고, 심의겸, 이이, 성혼, 윤두수 등을
서인이라 칭했는데 이는 당시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에 동인이라 하게 되었고, 심의겸의 집은 한성부 서쪽
정릉방에 있어 서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20190419_115426[증조 김수현 묘표]

심의겸과의 대립은 사림의 분열로 이어지고 점차 심해지자
우의정 노사신과 부제학 이이 등은 분쟁 완화의 조정안으로
두 사람을 한성을 떠나 외직으로 보낼 것을 선조에게 건의하여
김효원은 경흥부사로, 심의겸은 개성부유수로 전보되었다.

20190419_115448[우측에서 담은 / 좌 7대조 김사청 묘표 / 중간 6대조 김소남 묘표 / 우 5대조 김복기 묘표]

그러나 김효원이 더 먼곳의 외직에 배치되었다는
동인의 반발로 그 조정안은 실패로 끝났다.

20190419_115507[좌측에서 담든 / 좌 7대조 김사청 묘표 / 중간 6대조 김소남 묘표 / 우 5대조 김복기 묘표]

김효원을 지지하던 측에서는 일부러 배경이 없던 그를
더 먼곳으로 축출한 것이라 반발하여 다시 부령부사로 전보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부령이 변방이라 하여 반발하므로 다시 삼척부사로 옮기게 되었다.

20190419_115518[일선공 묘비와 뒤쪽 우측 문인석 전경]

성암은 34세부터 4년여에 걸쳐 삼척도호부사를 지냈다.
그는 미신 타파는 물론 인재 양성, 농사, 양잠을 권장하였으며
노인을 공경하고 선행을 포장하여 1년여 만에 고을의 면모를 일신했다.

은혜에 감복한 지역 주민들은 성암이 세상을 떠난 뒤 사당을 세워
기렸고, 후에 태수로 온 창석 이준이 글을 지어 이를 역사에 남겼다.

20190419_115521[좌측 문인석 전경]

인조9년(1631)에 삼척시 부정산 아래 세운 사당은
현종2년에 이건했고 순조24년에 중수와 함께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현종3년 강원도관찰사 한익상이 강당을 창건하였으나,
이후 고종5년에 훼철되어 學田(학전)과 서책을 삼척향교로 이관 하였다.

20190419_115536[좌 7대조 김사청 묘표 / 중간 6대조 김소남 묘표 / 우 5대조 김복기 묘표]

淸議(청의)를 주장하여 사림으로부터 선명성을 인정받고 동인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10여년간 지방관 생활을 하며 서원과 서당 설립을 장려, 권장하는 등의
문교 진흥 정책에 힘썼다.

또한 당쟁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고
정치와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또한 지방관으로 재임하며 사사로운 일로는 한 번도 도성을 밟지 않았다.

20190419_115546[ 7대조 김사청 묘표 ]

20190419_115550[6대조 김소남 묘표]

20190419_115555[5대조 김복기 묘표]

20190419_115628[맨끝 선신김씨 묘(?)]

선비들과 강론을 할 때면 가난한 살림에도 음식을 나누었고,
더러는 해가 저물 때까지 식사조차 잊을 정도였다. 또한 그는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여 이황과 조식 등에게서 배운 학문을 후대에
전수하여, 직접 후학을 양성하여 성리학자들을 길러냈다.

20190419_115655[묘역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안악군수, 영흥부사로 승진하여 재직 중 사망하였다.

20190419_115914[좌측 문인석 뒤 전경]

조선왕조실록 김효원 졸기에는
‘야박스러운 습속이 떠들어대며 서로 선동한 데서 나온 것이지
이 두 사람이 각자 당파를 만들어 불화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
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20190419_115928[우측 문인석 뒤 전경]

도를 지키고 나라를 걱정한다는 지향점은 같았지만
서로 사소한 오해가 예기치 않게 커져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한 두 사람이다.

저서로는 ‘省菴集(성암집)’이 있다.

20190419_115824[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안악군수, 영흥부사로 승진하여 재직 중 사망하여
묘갈명은 갈암 이현일이 썼으며
‘조정에 있을 때 正色(정색)과 直言(직언)으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일시의 권간들이 모두 다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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