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6살! 한분은 시집 오는 날 처음으로 신랑 얼굴을 보다.

한분은 16살에 시집을 왔다.일본놈들한테 들키기 전에 빨리 시집을 보내야 안심이 된다는 아버지의 딸 사랑의 표현이었다.한번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사람한테 시집을 오는 것은 보통 큰 모험이 아니었다.한분은 아버지의 마음도 아버지의 서두름도 다 알았다.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일을 함께 해 보시면서 성실하고 생각이 바르다고 아버지가 딸의 신랑감을 골랐으니 믿을만도 했다.하지만 직접 안 본 사람이라 아버지 말씀이 진짜인지? 의문이 되기도 했다.그  사람이  혹시 병신은 아닌지 마음이 조리기도했다.절름발이는  아닌지? 혹시 벙어리는  아닌지? 얼굴 가득 곰보 자국이 있는 사람은 아닌지?여간 마음 쓰이지 않았다.음력 10월 12일이라 이미 겨울 가운데 들어 서 있어 추울 때인데,한분의 가슴 조림을 풀어 주기라도 한 듯 시집 오는 날은 날씨가 풀려 따뜻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방안에서 가슴이 설레었다.대체 어떤 남자일까? 궁금하기 짝이없었다.신랑이 밖에  와 있다는 소리에 조심스럽게 빼꼽히 문을 열고  내다 보았다.

잘 서 있는 것을 보니 절름발이는 확실히 아니다 싶어 안심이 되었다.키도 크고 얼핏 보았지만 생긴 것도 괜찮았다,분명 곰보는 아니었다.한분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결혼식날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가슴 설레임을 안고 식을 치렀다.

가마를 타고 친정집을 나섰다.태어 나서 16년동안 자란 5층 석탑이바로 집 앞에 있는  조탑동을 지나 운산을 지났다. 큰 하나들을 지나서 드디어 귀미동에 도착했다.한 30분 정도 거리니 가까운 이웃이었다.가마 속에서 내다보는 시골 풍경이 참으로 정다웠다.5일마다 서는 운산 장까지는 와 보았지만 귀미동은 생전 처음이었다.

시댁에 도착해서 패백을 하면서  시댁 식구들을  소개 받았다.시어르신들은 참으로 자상하시고 인품도 좋으셨다.막내며느리에 대한 사랑도 남다르셨다.  형님들도 시누이도 참 성품들이 좋아 보였다.한분의 두려움이 조용히 가슴에서 내려 앉았다.정말 시집을 온 것이다.이제 아버지 말마따나 이 집 귀신이 되어야되니 어떤 일이든 잘 감당하리라 마음 먹었다.혹시라도 힘든 일이 있을 땐 일본놈들한테 붙들려 간 친구들을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같은 일직면인 조탑동에서 나고 자랐지만 걸어서 30분 밖에 안되는 가까운 거리의 귀미동은 낯설었다.시집이기에 느끼는 아직은 익숙지 않은 거리감 같은 것이었다. 용규를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었다.단지 아버지를 통해서 능력있고 실력있는 잘 생긴 청년이라는 말만 들었다.거짓말 할 줄 모르는 아버지시니 한분은 그 말을 철썩같이 믿었던 것이다.속은 아직 잘 모르지만 겉으로 봐선 아버지 말씀이 맞다 싶어 안심이 되었다.

 

용규는 1919년 9월 9일,한분은 1925년 5월 26일 생으로 6살 차이가 난다.둘 모두  4남매 가운데서 자랐다.한분은 언니와 여동생 남동생을 한 명씩 둔 둘째였고 용규는 두 형과 누나를 둔 막내였다.한분은 어려서부터 바느질 솜씨도 좋아서 시아버지 도포를 직접 만들어서 시집을 왔다.도포를 직접 지어 왔다는  소문이금방 나서  시집 오자마자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안동은 시집 올 때 시아버지 도포를 해 오는 풍습이 있다.안동포로 지은 도포는 시아버지한테 최고의 선물이 되었다.어린 한분이지만  그것을 잘 알기에 정성껏 손수 시아버지 도포를 지었는데 이렇게 칭찬 받는 일이 되었으니 기분이 좋았다.그 덕분에 시집살이도 즐겁게 행복하게 시작하게 되었다.


도포는 안동 양반의 옷이다.  유교적 색채를 강하게 띠는 것이다. 한분은 어머니한테 안동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다.직접 집에서 삼을 길러서 베를 짜는 것까지 다 보면서 자랐기에 어머니의 말씀이 쉽게 이해가 되었다.
안동포는 안동지역의 유명한 토산물이기도하다. 주민들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이 이 옷 속에 들어 있는데 섬세하고 정교한 공정을 거쳐서 생산되었다.정성스레 한 땀씩 한분은 시아버지 도포를 직접 지어서 준비했다.
도포는  공식적인 모임이나 행사 시의 기본복장이기도 하고  죽은 사람에게 맨 마지막에 입히는 수의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안동 일원에서는 신부가 시집을 올 때 시아버지의 도포를 마련해 오는 것을 굉장히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 안동포 도포는 양반과 선비들의 대단히 중요한 복장이었다.비록 가난하지만 선비 집안으로 시집 오는 한분은 시아버지 도포는 물론이고 신랑의 한복까지 만들어 왔다.치수를 잰 적도 없지만 아버지께 들은 말씀 만으로 지은 옷이 시아버지한테도 신랑한테 딱 맞았다.한분의 바느질 솜씨를 가히 칭찬할 만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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