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좋은 이웃 (연재 소설 ‘JOY!’)

2,좋은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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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이민자들이 집을 구할 동안 홈스테이를 많이 했다.

감사하게도 우리 가족은 이미 계약된 아파트로 바로 들어 왔다.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아빠의 준비성과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가 있었다.
6개월치 아파트비를 미리 보내서 계약이 되었다.
캐나다에 크레딧이 전혀 없기에 6개월치를 미리 내야된다고 했다.
아빠의 고등학교 친구 누님이 토론토에 오래전에 이민와 계셨다.
그 덕분에 우리가 도착하는 시기에 맞춰서 아파트를 구해 주셨기에
우린 커다란 이민 가방 여러개를 내려 두고 다른 것으론 채워지지 않아
텅 비었지만 우리 집이라는 안도감으로 캐나다의 첫 밤을 편안하게 맞이 할 수 있었다.
토론토  피어슨 공항에 도착한 것은 2000년 3월 1일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엥커러지에 경유하면서 잠시 멈췄을 때 나는 우리 엄마 아빠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내가 전혀 알아 듣지 못하는 영어로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잘도 하셨다.
영어는 아빠가 더 잘 하시는데 오히려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서 말을 하는 것은
우리 엄마가 더 잘 하셨다.
“우와~~~우리 아빠,엄마 진짜 영어 잘 하시네요”라고 나와 동생들은 한결같이 소리쳤다.
“고마워,이 정도는 다들 하시는거야,앞으로는 너희들이 훨씬 더 잘하게 될거야.”
엄마는 우리들에게 힘찬 격려를 해 주셨다.
나는 엄마의 그 말이 너무 좋았다.기대가 되고 힘이 전해 왔다.
정말 그렇게 되길 바라며 동생들과 새론 곳에 왔다는 설레임으로 가득했다.
나는 동생 3명과 함께 이민을 왔다.
내가 12살이고 3살 차이씩 나는 9살,6살,3살의 남동생이 함께 왔다.
엄마는 하나님이 주시면 여섯까지는 낳고 싶다고 늘 말씀하시기에
앞으로 2명의 동생은 더 가질 수도 있다는 기다림이 나는 항상 있었다.
나는 동생들을 사랑하고 좋아하기에 엄마가 동생들을 더 낳아 주신다는 것이 참 좋았다.
우리 아빠 엄마의 다정하시고 늘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
12명도 더 낳으실 수도 있겠다 싶은 행복한 마음이 들곤 했다.
맏이인 내가 딸인 것이 참 감사했다.
여러 동생들을 돌보는데 내가 엄마를 많이 도와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중학교 영어 선생님을 만 4년 하시고 결혼을 하셨다.
내가 허니문 베이비로 바로 들어 섰기 때문에 엄마는 나를 출산하신 후엔
더 이상의 미련을 두시지 않고 전문 엄마의 직업을 택하셨다.
나는 엄마의 용감한 이 결정이 늘 감사했다.
그리고 엄마의 말씀이 내 가슴 찡하게 했다.
모두가 아까운 자리니까 아이는 돌봐주는 사람한테 맡기고
선생님 일을 그만 두지 말라고 했다셨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위해 과감히 선택을 하셨던 것이다.
“선생님은 누구라도 할 수 있고,하고 싶어 대기 하는사람들도 많아,
하지만 우리 기쁨이를 가장 잘 키울 수 있는 선생님은 엄마만한 선생님이 없기 때문이었지”
나는 엄마의 이 말씀에 항상 감동을 한다.
엄마의 선택이 나를 이렇게 또 잘 자라게 하셨다는 감사가 크게 일었다.
친구들은 종종 엄마와 싸운 이야기 ,엄마에게 불만인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사실 나는 우리 엄마한테 친구들이 느끼는 그런 것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
엄마랑 늘 소통이 잘 되어 왔으니 더욱 그러했다.
낯선 땅에 오니  엄마도 나도 더욱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갔다.
정집사님 가족은 참 착하고 화목했다.
우리 부엌에 필요한 아주 기본 적인 도구를 미리 다 갖다 놓으셨다.
캐나다는 우리나라와 다른 것이 있었다.
부엌의 냉장고와 오븐은 기본으로 아파트에 미리 다 설치 되어 있다고 했다.
우리가 따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반가웠다.
방이 2개이지만 거실은  넓었다.
나는 아빠,엄마가 풀다가 두신 이민 가방들을 동생들과 함께 뛰어 넘어 다니며
신나는 첫 밤을 맞았다.
이민 가방에 넣어간 밥솥과 냄비와 몇 가지 챙겨온 재료로
엄마는 캐나다에서의 첫 요리를 시작하셨다.
캐나다 와서 첫 날 늦은 밤에  먹어 본 라면 맛은 한국서 먹던 때와 비교가 안되었다.
그 어느 맛에  비길 수 없이 맛있었다.
아직은 이른 봄이라 쌀쌀하기에 전기 담요도 하나 챙겨 주셨다.
아빠 친구 누님이셔서 아빠도 누님이라고 부르셔서
나는 고모라고 정집사님을 부르게 되었다.
큰 아빠와 삼촌만 있기에 못 불러 보았던 고모라는 호칭이 너무 좋았다.
좋은 이웃들까지 계시는 토론토는 내게 설레이는 매일을 기다리게게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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