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죽어서가죽을남기고사람은죽어서이름을남긴다,라는
말을살아생생펄펄한사람들이떠벌이며
숭상을마지하지않는가운데에,
이곳에서멀지않은미네소타의인디안보호구역에서
콜롬바인이후최대의총기사고가나서
사람들이또탄호떡을들고난리를치고있습니다.
열여섯살의원주민남자아이가백호주의의상징인히틀러를존경하다가
경찰인자신의할아버지총기를빼어들고
그할아버지와그의여자친구를죽인후,
학교로진입,웃고손을흔들어대면서사람들을쏴죽였지요.
백인들의원주민학대역사는
캐나다에서도’더러운비밀’이라고일컬어집니다.
원주민들의아이들을카톨릭기숙학교에집어넣고
언어와문화를소거시키며학대,방관한사실은
아직도끊임없는법정분쟁으로번지고있습니다.
소수민족의이민사에도이런비밀은넘쳐납니다.
1800년대말에이민자를받아들이는과정에서
오직황인종인중국인들만이머리당,
당시로서는거금인’5불’을받고캐나다로의랜딩을허용했고,
그들은대륙횡단열차공사에투입돼수많은희생을낳았습니다.
어려운상황에서도특유의근면함으로
밴쿠버의상권을장악한일본인들은
이차세계대전가운데에거의모든재산을몰수당했고,
그재산들은헐값으로백인들에게넘겨졌습니다.
황인종뿐만이아니라,
스탈린의치하에서탈출한우크라니아의가난한이민자들은
대기업과결탁한정부의비호아래
추운북쪽지방의벌목꾼으로싼임금에제공되었습니다.
얼마전에대서양연안주들이
마니토바의이민프로그램에서착안해
십일만불만기탁하면
빠른시일내에영주권을주겠다는발표를했습니다.
그런데그대서양연안주의실제사정은
얼마전에다큐멘타리가나왔을정도로밝지않습니다.
어업의불황으로학교정원의반이줄고
사람들이떠나고있는그런사정입니다.
캐나다는지금,
과중한사회주의의정서가정부의관료주의를노후화시키고
또한편에는극단의거품자본주의가생산성을무력화시키고있습니다.
그래도덜하다는캐나다에서
F.B.I(F%$#ingBigIndian)는흔히원주민들을경멸하기위해쓰여지고,
수많은은어가소수민족을놀리기위해늘어갑니다.
이민자의60%이상이자신의의지와상관없는업종으로
생계를유지합니다.
‘말할수없는존재의무기력’이아닐수없습니다.
그래도돈을싸들고오겠다는데,
그래서가끔은대기오염도,수질오염도,
실업률의증가도,건강보험시스템의위기도
이민자의증가탓으로돌려도말한마디안나오는데,
자신의밥그릇을지키기위해서라도마다할정부가아닙니다.
캐나다의미덕을얘기하지않고얘기를끌어온이유는이렇습니다.
돈과지위로차별하는낯익은우리사회의모습이
다른유색인종에게유독뜨악해하는시선을던지며
굴절된채사는것은아닌지.
이해만을바라는철부지아이같은우리는없는지.
그리고새로운출발의희망에눈멀어
너무나조급하게덤비는새로운이민자는없는지.
원주민아이가히틀러를숭상했다니,
우리는이미지나온궤적을되돌아갈수없을만치
멀리왔는지모릅니다.
희망을조심하라니,
주스도제정신이아닌지모르겠습니다.
그러나비어야차는물그릇처럼
사람살이는살아서비우고,살아서삶을냉정하게볼필요가있습니다.
호랑이의가죽과남은이름은모두죽음을전제로하고있습니다.
살아서포효하는호랑이와
살아서제이름을가꾸는사람이필요할때입니다.
부활절이었습니다.
성경의이야기야다아시는거고,
절기로치면부활절은춘분이지난후첫번째보름이후의첫일요일을의미합니다.
성탄절이절기상으로-역시,이야기는빼고-
동지가지난후,태양의소생을축복하듯이,
부활절은봄의달이불러오는땅과흙의생산력을축복합니다.
축복하지않을수없습니다.
꽝꽝얼어있던온세상이제옷고름을푸는데,
우리마른가슴이꽁딱거리며반가워하지않을수없습니다.
우리는살아있습니다.
선량함의부활을믿으며살아있습니다.
누가예수님에게이름을남겼다할것입니까?
사랑이있을뿐입니다.
그리고삶은계속이어집니다.
이민을생각하거나이미이민한우리들은,
지금진정살아있습니까?
푸짐한보름달을향해초승달처럼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