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탕평평(蕩蕩平平)에 대하여….
서경(書經)홍범(洪範)편에이르기를…..

여불능사유호우이가(汝弗能使有好于而家)하면,시인기사기고(時人斯其辜)하리니,우기무호덕(于其無好德)에,여수석지복(汝雖錫之福)이라도,기작여용구(其作汝用咎)리다.무편무피(無偏無陂)하야,준왕지의(遵王之義)하며,무유작호(無有作好)하야,준왕지도(遵王之道)하며,무유작오(無有作惡)하야,준왕지로(遵王之路)하소서.무편무당(無偏無黨)하면,왕도탕탕(王道蕩蕩)하며,무당무편(無黨無偏)하면,왕도평평(王道平平)하며,무반무측(無反無側)하면,왕도정직(王道正直)하리니,회기유극(會其有極)하야,귀기유극(歸其有極)하리다.(이하생략……………)

가로되,만약백성이덕(德)을싫어하고멋대로날뛰면왕(지도자)이보살펴행복하게하려해도결국은화(禍)가주어진다.사람의인심은무엇보다중요해서비록그른마음을가진자를두둔하여생활에도움을준다면오히려세상은번잡해질뿐이다.그러므로지도자는앞장서서백성이선행(善行)하도록선도할필요가있는것이다.지도자는항상공평무사(公平無私)한태도를가져야하나니좋아하는사람이라해서능력없는사람을중히쓴다면나라가어지러워지는근원이되고또사람을미워하는것도삼가야한다.자기마음에들지않는자는실력이있어도물리치고그다지죄가없어도형벌을준다면세상은어지러워지는것이다.지도자는누구에도치우치지아니하고공평무사한태도를갖는다면지도자의길은순조로울것이며또지도자는바른도에일치(一致)하면천하가도에돌아와도에의해통일되는것을이상으로삼아야할것이로다….

탕평책(蕩平策)은말처럼쉬운게아니다.

사색당쟁은선조임금시절임진왜란을전후하여두드러지기시작했다.처음은동인과서인에서비롯하여동인은남인과북인으로서인은서인대로노론과소론으로,또남인은청남과탁남으로갈라서더니만북인은북인대로다시대북과소북으로갈라서고,노론은시파와벽파로찢어져지지고볶고하루도평안한날없는조선의역사와나라자체가아수라장이었다.그렇게세월을날려버리는와중에영조대왕에이르러붕당정치를억제하고왕권을강화하기위한수단으로탕평책(蕩平策)을시행하여노론,소론,남인들을고루등용하는움직임을보였으나영조의지지기반이노론에있었기에시작부터한계가있었고,그런속에서사도세자사건이터지며사도세자를처형해야한다는벽파(노론강경파)와사도세자를살려줘야한다는시파(노론온건파,소론,특히남인)의대립이있은관계로탕평책을도입한취지가결국유야무야되어버린것이다.영조의뒤를이어정조대왕이탕평정책을이어받아개혁정책에몰두할즈음뜻하지않은정조대왕의의문사로인하여탕평책이라는단어자체가아주없어져버리며이후노론의벽파가재집권하여시파를대청소하면서조선의멸망에이르기까지노론이권력을장악하는단계를거치는것이다.이처럼탕평(蕩平)이란간단한구호외치듯그리쉬운게아니다.

탕평을깨운사람들.

뭐,내가생각해도치가떨리고약이오르는부분이있었다.경선내내서로간혹시라도있을아픈상처를헤집어내어그기에소금까지뿌린형상을부인하지는못할것이다.어느쪽이든패자가되는경우어쩌면밥줄이끊어질지모른다는강박관념에상대를쓰러트리지못하면내가죽는다는필살의각오로좀지나치거나과격한장면이연출된것도없지않아있었다.그런광경을목도할때마다아무리밥그릇싸움이지만해도너무한다싶어치가떨리기도했던것이다.그러나당락이결정되든날한쪽은‘깨끗한승복’을하였고,승자는그승복을‘아름답다’라고표현하며모든것을함께하고아우르겠다며경선기간동안감정의묵은찌꺼기를남김없이불식시킴과동시에이땅에수백년간조용히잠자고있던탕평책(蕩平策)이라는어려운(실행하기어려운)단어를깨워놓고말았던것이다.

입으로는탕평을외치며살생부를…???

그렇게잠자는숲속의미녀같았던탕평책을깨워놓았으면유효적절하게용도배치하면될것을어느정도시일이지나자승자의도량은간곳없고저희(승자)끼리의기양양,희희낙락하며여유를부리는것까지는좋은데그도가넘쳐흐르다못해패자의쓰라린상처는아랑곳하지않고“석고대죄라느니,반성을하라는둥”된장을바르고비벼대며유린의조짐까지보인다.역지사지라했던가.만약입장이바뀌어승자와패자가바꾸어졌다면어땠을까.경선기간동안아무리삼가야할얘기들이오가고상처를입었다지만,“승자”라는이한마디는그어떤보상과도맞바꿀수없는최상의보상이다.상처뿐인영광같은이율배반적승리와는확연히다른그런보상을받았다면그런보상에준하는최대한의아량을보여야할것이다.입으로는탕평을외치고머리를맞대고살생부의초안을그리는그런어리석은짓을말아야할것이다.무릇탕평의한구절에이르기를….“지도자는항상공평무사(公平無私)한태도를가져야하나니좋아하는사람이라해서능력없는사람을중히쓴다면나라가어지러워지는근원이되고또사람을미워하는것도삼가야한다.자기마음에들지않는자는실력이있어도물리치고그다지죄가없어도형벌을준다면세상은어지러워지는것이다.”라는어귀를다시한번더읊조려보고싶은것이다.

덧붙임,

당쟁을슬기롭게이겨낸분들.

이런저런당쟁이일어날때,십만양병설의이율곡은동인의공세를받아서인이되고서애유성룡같은사람은오히려서인의집중공격을받고동인이되었던것이다.그러나이율곡이나유성룡이나한당파에가담하기보다는당파가나뉜것을걱정했으니유성룡은유성룡대로동인쪽에서당파를화해시키려고노력했고이율곡또한서인쪽에서화해를시도했지만끝내두당파를화해시키지못한채선조17년에세상을떠나고말았다.머지않아임진란이발발한이후선조는우선도망치기급급하여어디로갈것인지를중신에게물었다.그때조선군은남쪽으로부터지리멸렬하여왜놈들에게국토를유린당하고있었고,선조가가장믿었던신립(申砬)마저탄금대에서패전한뒤죽었을때인지라선조는조선은이미망한것이나진배없다고생각했으며제정신이아니었고옆에있던도승지이항복에게그뜻을물었다.이항복은여차직하면압록강을넘어요동으로나아가명나라로튀자는계책을올렸고유성룡은결단코압록강을넘어서는안된다고반대를하였기에두사람은극심한논쟁을벌였었다.두사람이어전에서물러났을때유성룡이이항복을책망하여가로되“어떻게경솔히나라를버리자는의논을내놓는가.그대가비록길가에서임금을따라죽더라도궁녀와내시의충성밖에는되지못할것이다.이말이한번퍼지면인심이와해될것이니누가수습할수있겠는가?”이에이항복이사과하였다.(국조보감선조25년5월)또한선조실록에도유성룡의질책에“이항복이사과하였다”라고전해진다.서애유성룡의당적(黨籍)은어느새동인에서파생된남인의우두머리가되어있었고,이항복은서인의거두로있었지만,두사람은당파를넘어당파보다는국가라는큰틀에서는서로화합을했던것이다.뿐만아니라이항복은이후여러차례유성룡이곤경에빠질때마다당파를뛰어넘어옹호를해주었던것이다.

서로다른당적을두고도국가의큰일앞에서는당파를초월하여화합과상생을도모했던것이다.하물며같은당파끼리라면….옛선인들의아름다운행적을돌이켜볼필요가있는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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