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좌익정권은불문가지(不問可知)이고그10년의질곡속을몸부림치며벗어난오늘의보수정권시대에도변하지않는것이딱하나있다.그때나지금이나대한민국의정체성이나대통령의권위는북한김정일의인준(승인)이있어야되는듯하다.있는것없는것가져다바치고도큰소리한번내지못하고끌려다닌10년세월도그러하려니와나라의체면과국민의자존심이구겨질대로구겨진그꼬락서니보기싫어정권교체를해주었건만여전히주석궁의김정일안전에서는고양이앞의쥐형상을하고있는모습에과거역사속의굴욕적외교가생각나‘썰’을풀어본다.
카놋사의굴욕
서기1073년’그레고리7세‘는교황에오르자황제에의한사교임명을금한다는단호한조치를취한다.그로인해당시의로마황제’하인리히4세’와정면충돌을하게되는데,그사건이있기100여년전으로거슬러올라간서기962년독일황제’오토1세‘가이탈리아를병합하여신성로마제국의황제에오른후대를내려오며황제가교회의임명권까지가지고전횡을부리는것을더이상은두고볼수없었던’그레고리7세’는교황에오르자마자교황의권위와교권의확립을위해그런단호한조치를취했던것인데,’하인리히4세‘는자기의힘만믿고교황의폐위를선언하자교황은이에맞서오히려’하인리히4세’를파문해버리고말았다.
그런데이파문의조치는놀라운것이어서교회는물론제후와신하들까지도황제를등지고교황의편에서는효과를가져온것이었다.당황한’하인리히4세’는굴복을자인하고’카놋사’에있는교황을찾아갔다.때마침몰아치는눈보라를무릅쓰고교황의성앞에몇시간동안이나서서용서를빈끝에간신히뜻을이루었다.이사건이사상그유명한’카놋사의굴욕‘이다.
삼전도의굴욕.
1636년4월청태종은조선에게군신관계를요구하였다.조선이계속강경한자세를보이자12월10만대군을스스로거느리고수도심양을떠나,9일압록강을건너쳐들어왔다.인조는강화로피난하려하였으나이미청나라군에의해길이막혀,만조백관을거느리고남한산성으로피난한다.그러나얼마뒤성은완전히고립되고,그런과정속에주화파와주전파의논쟁과대립속에주화파의주장이우세한가운데포위된지47일만에마침내성문을열고오늘의송파구삼전도에서인조는청태종에게항복하는것을두고역사는‘삼전도의굴욕’이라고하는것이다.삼전도의굴욕에대해보다구체적인기록을찾아보면,,,,
①청나라에게군신(君臣)의예(禮)를지킬것,②명나라의연호를폐하고관계를끊으며,명나라에서받은고명(誥命)·책인(印)을내놓을것,③조선왕의장자·제2자및여러대신의자제를선양에인질로보낼것,④성절(聖節:중국황제의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황후·황태자의생일)·경조(慶弔)등의사절(使節)은명나라예에따를것,⑤명나라를칠때출병(出兵)을요구하면어기지말것,⑥청나라군이돌아갈때병선(兵船)50척을보낼것,⑦내외제신(諸臣)과혼연을맺어화호(和好)를굳게할것,⑧성(城)을신축하거나성벽을수축하지말것,⑨기묘년(己卯年:1639)부터일정한세폐(歲幣)를보낼것등으로되어있다.부연하여,이정도면솔직히국가도아닌청나라일개지방의성주나도백(道伯)에지나지않는수치와굴욕적외교였던것이다.
그알수없는현정권의굴욕적태도.
참으로그원인과이유를모르겠다.이명박정권의행보가어디까지갈짓자걸음에대가리없어진뱀처럼우왕좌왕꿈틀거리는지도시감이잡히질않는다.금강산관광객총격사망사건이후,적반하장하는북괴에대해한나라당과정부는침묵하고오히려좌빨잔당인민주당이"적반하장"이라며북괴를강도높게비판했다는것이다.즉,보도에의하면.과거북한에강경했던한나라당은몸을사리고있는반면,북한을감싸고돌기급급했던민주당이오히려북한을비판하는목소리를내고있다는것이다.도대체무엇이이정권으로하여금입을다물게하고북괴의오만을온몸으로받아들이는굴욕적자세를보이는가.
인조가삼전도에서청태종에게굴욕적항복을할때,삼배구고(三拜九叩)라는예를올렸다는것이다.원래는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는것인데,세번절하면서그때마다세번씩머리를땅에조아리는행위로서지극한예를두고이르는말인것이다.하물며그런예를드리는과정에서도청태종은트집을잡아인조는피투성이가될정도로몇십번머리를땅에부딪쳐야했다고전해진다.이와같이현정권과이명박대통령은좌빨정권에도없었던정일장군님께‘삼배구고(三拜九叩)’의예를올리기로작정을하셨는지아니면정권을잡자말자어정쩡한대북관계론을주장했던것과는달리만고불변의법칙인북괴의오만함과반발에부딪히자신성로마제국의’하인리히4세’가카놋사에서교황앞에무릎을꿇듯지나친굴욕적태도에밥맛도떨어지고입맛도함께떨어져해보는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