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과 양녕 그리고 봉하대군.
전대통령노무현의실형노건평(이하봉하대군)사건을보면참재미(웃을일은아니지만,전대통령형제가벌이는썰렁코미디에안웃을수도없고…)있는현상이나타난다.이재미난현상을고찰(考察)해보면,이번사건은어쩌면운명적이거나필연적일수밖에없는사건이다.애당초이사건의빌미와단초를제공한명칭이“세종”증권매각비리의혹이었던것이다.왜하필이면“세종”인가…그리고어째서노건평이‘봉하대군’이라고인구에회자되었던가?조선왕조500년역사에‘왕의형님’으로살아가며많은사회적문제를일으킨이가바로양녕대군이다.

따라서얼마전종영된‘대왕세종’대하드라마도있었지만,“세종”을논하자면,장형되는양녕대군의얘기를아니할수없다.누구나아는사실이지만,양녕은왕세자에책봉이되었으나자유분방한성격탓으로궁중생활에잘적응하지못했다.궁을몰래빠져나가는일이잦고,사냥이나풍류를좋아해서자주부왕태종의화를돋우었다.또한그는여색을좋아해서,상왕정종의애첩이었던기생과사통하는가하면매형의첩이었던기생과도통정을하고,특히그가좋아했던‘어리’라는애첩때문에태종과극단의관계까지몰고가다끝내폐세자된다.심지어이조실록에는여염집에‘좋은개가있다는말을듣고사람을시켜몰래가져오게했다‘고도기록되어있다.일부사가(史家)와야사(野史)에는그가스스로왕세자자리를거부하기위해이러한파행과기이한행동을했다는일설도있으나,추론일뿐사실(史實)에근거하는바가없다는것이다.그는아우충녕이왕이된후에도요시찰인물로감찰대상이었고,때론유배지를벗어나함부로돌아다니는바람에탄핵을받기도했다.그러나세종은그에대한지극한형제애를들어내며수십차례에걸쳐올라온탄핵상소를끝까지받아들이지않았고,만년에는수양대군의찬탈에종실의어른으로깊이관여하여국정에도영향을미쳤으나69세로천수를다하였다.

그렇다면오늘날의‘양녕대군’이랄수있는‘봉하대군’은어떤가?여염집의개를끌어오고하는따위의파행은없었지만(혹시세상사람들이모르는사실이있을수도…)이양반역시지난날의양녕대군의기행과흡사한부분이많다.비록‘설’에불과하지만,여자문제도그렇고,자신의동생이권좌에앉자마자불거져나온각종비리.부정과의관련설이여럿대두되었으나,최고권력자의친형신분인만큼조사의대상(탄핵)에서용케도빠져나갔고,이렇게그가무탈하게빠져날수있었던것은누가뭐래도전대통령노무현의지극한형제애의보살핌이라아니할수없는것이다.수차례에걸쳐올라온탄핵상소를“시골에서농사짓는보잘것없는촌사람”이라며연막을치며탄핵을일소에부치기도했던것이다.물론인간적인측면에서생각해보면봉하대군역시이나라지존의친형노릇을하자니언론이나방송그리고주위의눈치를보며숨한번재대로크게못쉬고힘들기는했을것이다.그런차제에이런저런유혹을물리치며(하긴이번사건말고도더있을수도…???)잘버텨왔지만,굴러온호박덩이가“보잘것없는촌사람”이사양하기에는너무도매력(?)이었기에어느한순간자제력을잃고덥석물어버린게오늘날“세종”사건인것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했던가?뭐,솔직히봉하대군자신이‘보잘것없는촌사람’으로평범하게살기가버거웠는지도모르겠고아니면주위의‘파락호’들이그런삶을살도록내버려두질않고부추겼는지는모르되,의금부로끌려간봉하대군“실컷이용만해먹고….”라는자조(自嘲)섞인후회와더불어옛친구와동지들을행태를비난했다는데,옛말씀에이르기를“군자지교(君子之交)는담여수(淡如水)하고소인지교(小人之交)는감약례(甘若醴)니라했으니,즉군지의사귐은맑기가물과같고,소인배의사귐은달콤하기가단술과같으니라”이런걸보면나자신도또아이들도좋은친구사귀라는교훈적사건인것같다.또어떤놈이단호하게얘기하기를“한번걸리면패가망신한다.”라고했는데,저집구석은무사할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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