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전전해에(피난을가서야호적에올려서실제는한살이적다)나는종로구적선동에서세상의빛을보았지만서울이어떤곳인지몰랐다.그전쟁으로말미암아장남은한쪽다리없는병신이되었고사랑하는아내는한쪽어깨가다떨어져나가한쪽팔이없다시피한채,그다음해1.4후퇴때가되어서야아버지와우리가족은선산이있는경북상주시로피난을갔고,상주시하고도깊은산골인내서면에서어린시절을보내며정말순수하고맑게자라왔었는데중학교에입학하고한학기를마치자아버지는무슨생각이드셨는지나혼자만서울로불러올리셨다.(당시아버지는안국동에서자취를하셨고온가족이환도한것은그다음해였다.)이른바전학을온것이다.그당시는왜나만먼저환도를시켰는지몰랐지만,내가철이든후에가만히생각해보니아버지의생각은따로계셨던것같았다.그리고또생각을해보면아버지의선택(?)이아주잘못되셨다는것을나스스로채득한것이다.
바깥에있던화분들을실내로옮겼다.
소위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고들하지만,나는이말에절대공감을않는다.왜냐하면‘소나말을물가로끌고갈수는있어도물을마시는것은소나말의의지다’라는단하나의진리이기때문이다.즉처음부터공부할놈은산골에처박혀도하는것이고안할놈은아무리최상의분위기를만들어주어도않는것이다.
서울지방법원말단서기의아버지는고향으로피난을하셨지만복직이늦어졌고다시복직이되신것은40대초반이었다.요즘같으면사오정이라고할때쯤이었으니박봉에시달리는지법의말단서기는판검사와변호사가부러우셨을것이다.당신보다새파랗게젊은어쩌면동생도한참동생뻘의수발을들거나‘영감님’호칭을꼬박꼬박붙여야했으니그들이얼마나부러웠겠는가?어쩌면내게모든희망을걸고계셨을것이다.장남이저리됐으니작은놈이라도그대열에올리고싶은간절한소망같은게있었을것이다.그리고올인을하셨을것이다.그러나…..
비록태생은서울이었지만,10년만에돌아온산골소년의서울생활(?)은눈이핑핑돌정도였다.어지럽게돌았다.이런세상이있었는가싶었다.처음엔겁도나고조심스러웠지만시나브로호화로운서울생활을즐기게된것이다.그래도중학교까지는산골의순진무구함이그런대로유지가됐으나고교를입학하며차츰허물어지기시작한것이다.돈이필요했고공납금그것도모자라면교과서를팔아서라도….심지어는아버지의사유물을훔쳐서전당포에맡기면서까지가출(고교2년때제주도로가출을하여5개월을보낸적이있었고그예유급을했다.)을단행하고…더이상얘기하면쪽팔리니….(차라리나를산골의소년으로그냥남겨두셨더라면어땠을까?생각이들때가있다.대소가친척중내또래의아이중에나만큼영민(?)하지도못했던아이둘이고시패스하고출세(?)를했으니…또그당시공부가한창재미가날때였는데…이모든생각은뒷날의것들이다.)
어렵게정말어렵게내가고교를졸업하던그해는각대학마다자율적본고사를치르는마지막해였다.즉그다음해부터‘대학입시예비고사’라는제도가도입되었던것이다.솔직히당시의대학교라는게이화.숙명등여자대학교는논외로치고소위SKY를제외하면대학교다운대학이없었다.다만서강대학교가신흥명문으로막발돋움하는정도였고,수도여자사범대(세종대),동덕,덕성,상명등등…지금은꽤명망(서울에존재하는서울대학교)있는대학교로거듭났지만당시는2년제전문학교수준이었고‘선생님’양성소인전국의모든교육대학역시2년제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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