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제일싫어하는게하나있다.가끔등장(?)하는입지전적인인물들중에고등학교만나오고심지어는초등만나오고성공했다며소개할때이다.그기에왜?학력까지들먹여야하는가?고등학교나초등학교만나온사람들은이목구비도갖추지않고뇌도없단말인가?괴물같은인간이성공했다는얘긴가?그런것들을반대로생각하면고등학교나심지어초등학교출신도성공하는데대학까지나와서빈둥거리는놈들은모조리접시물에코박고D져야하나?그비싼공납금내고훌륭한학문을닦았으면당연히성공해야하는것아닌가?성공못한놈들이괴물아닌가?그러니D져야한다.각설하고…
고등학교를네군데옮겨다니는불량품꼴통이었지만그래도어쨌든대학은가야했다.어쩔수없이당시로는학교같지도않은K大에지원을하였고다행히(?)정원에서두세명정도떨어져나가는기실지원자전부가합격한그곳에입학은한다.1학년을마칠즈음영장이나오자거침없이입대를했다.(사실그전에라도군대를가기위해해병대지원을했었다.)그렇게약37개월을근무하고제대를했을때집안의사정이많이호전되어있었다.
며칠후면수아주아가이곳으로내려온다.이곳유아원도이미정해두었다.지난번일주일간예행(?생활을할수있을지없을지를…)연습은그쳤고아주훌륭히적응을했다.
일제강점기시절아버지는종로‘가회동’에잠시생활하신적이있다고하셨다.나중에안일이지만아버지는가회동에집한칸장만하시는게소원이셨다는것이다.그래서그랬던지아버지의부름을받고가족중가장먼저환도를했을때아버지는가회동에서가까운안국동에서생활을하고계셨었다.그리고얼마후우리는좁디좁은이름만가회동으로이사를했고내가군대를다녀왔을땐제법번듯한한옥으로입주를하고계셨던것이다.아!한가지빼놓을수없는사실은아버지는시달리던박봉을걷어차고당시로는꽤명망있는변호사님의사무장으로이직을하셨던것이다.아무튼제대후의우리가세는궁핍했던지난날보다는훨씬발전한단계였지만,그때까지도어머니의입에서는‘돈’타령이그칠줄을몰랐다.
며칠전잠시서울집엘다녀왔다.꼬맹이들놀이방을하나만들었다.친손녀예솔이와쌍둥이들이놀이방에서정답게노는모습이정말흐뭇하다.
제대를한나는갈등하기시작했다.처음부터학문과는거리가먼나였다.그리고학문을닦기위해대학을간것이아니었다.예나지금이나좋은데취직하고잘살려면대학을꼭가야한다는아버지와사회적분위기때문에어쩔수없이택한길이었지만도대체수긍이가지를않았고,이제간신히좀살만한데내가공부에매진(그리할수도없었지만..)한다면집안의가세가염려됐었다.사실이그랬다.핑계가아니라당시대학교를우골탑(牛骨塔)이라고들했다.전재산인논밭과소를팔아학비를댔으니집안이성할리가없었다.그리고정말큰이유는‘돈돈돈’타령을하시는우리어머니께언제돈방석에한번앉혀드리고싶었고,아무리대학나오고월급을많이타도결국월급쟁이는별것아니라는생각이지배적이었다.언제월급모아어머니앞에옛소!하겠는가.몇날며칠을나름고민한끝에조용히아버지앞에무릎을꿇고마음속의얘기를전해올렸다.의외의반응이었지만아버지는‘정히그렇다면네뜻대로…’당연히(?)복학을포기하고내가처음잡은직장은지금도있는지모르겠지만구로동소재‘동립산업(밀가루.설탕등)’이라는,419당시부통령이었던‘이기붕’의소유로서혁명과동시부정축재로몰수당한그회사의‘자재’부서였다.
싸우지않고이런모습으로자랐으면좋겠다.
내가무엇을할것인가?어머니에게돈방석을선물하기위해어떻게할것인가?‘동립산업’에서안주할생각은없었지만,이미군대도다녀왔고한사람의성인으로당장은내스스로의호구지책을마련하는방편으로그곳을택했던것이다.그리함으로서이제겨우살만한집안에피해를주지않을것이고어머니를위한돈방석을만드는방법을연구하기위함이었다.사실나름의계획이있었다.
그날은예솔이둘째돌이라왕언니은비까지참석했다.손녀넷이한꺼번에한자리에모였다.정말행복하다.
지금은늙었거니와…사실난노래를무척잘했다.가창력도있고목소리가참청아했었다.특히당시주가를올리던‘나훈아’의노래를모창하면완벽할정도로똑같았다고했다.그것으로미아리일대의맥주홀두세군데에서알바를하며,언제고음반도내며정식가수로데뷔하겠다는야무진꿈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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