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Ⅱ.

625동란이일어나고흥남철수같은비극이나아비규환만있었던건아니다.전쟁초기에우리군은낙동강전선까지북괴에게밀렸지만맥아더장군의인천상륙작전성공으로서울을탈환했던게소위928수복이다.그런데928수복의기쁨은아이러니하게도우리집안이쑥대밭이되고만날이었다.당시우리집은내자호텔(종로구내자동에소재했으며최초의주한미군사령부,현재는서울지방경찰청청사든가?)뒤편에있었는데928수복일까지인민군잔당의본부로쓰였다는것이다.

그런데그날우리국군이진격을해오며잔당을향해쏜박격포탄이불행하게도우리집으로떨어져당시수송초등학교3년이든우리형님은왼쪽다리대퇴부까지잘려나갔고,어머니는오른팔이떨어져나갔던것이다.당시세살이었던나역시척추어딘가에파편을맞았다고얘기했지만,이날까지멀쩡하게지내고있다.의료시설이나외과적기술이형편없었을텐데도구사일생으로살아남아1.4후퇴때피난을내려갔던것이다.928수복후국군과유엔군은질풍노도와같이북진을거듭하며압록강과초산까지진격하였으나이른바항미원조전쟁이라고불리는중공군의개입으로인하여후퇴할수밖에없었던게1951년1월4일즉1.4후퇴라는것이다.

훗날들은얘기지만(꼭그얘기가아니더라도그당시는지구온난화같은게없었으니…),하필이면그해처럼맹위를떨치는추위도없었단다.그럴개연성이충분했던게‘눈보라가휘날리는바람찬흥남부두에…’하는,현인선생의‘굳세어라금순이’노래가사에도나와있듯어지간히추웠던모양이다.(참고로국제시장의모티브가됐던흥남철수는1950년12월10일)

어쨌든국군을따라평양에서서울을거쳐부산까지피난을온한피난민가족이부산국제시장근처의한다리를밑에서추위와굶주림에아사(餓死)직전에있었다.

이때그부근을우연히지나던사람이다리밑에서다죽어가는이불쌍한피난민가족의정경을보고다가간것이다.당시는말할필요도없이하도많은피난민으로인산인해를이루고있었고,아비규환(阿鼻叫喚)과목불인견(目不忍見)의참상이도처에널브러져있었기때문에그냥지나칠수도있는상황이었지만,그사람은이상하게자신도모르게발걸음을재촉하여그가족곁으로갔던것이다.그리고그는거의다죽어가는그를찬찬히훑어보았는데그는일제강점기시절이었던그옛날평양에서큰포목상을했던주인의아들이었다.

(장면이바뀌어,그사람의어린시절로…)그는함경도모처의정말가난한집안의태생이었다.그것도거시기가찢어질정도로가난한집안의장남.그는가출을하여무조건살길을찾아이곳저곳을헤매다평양까지굴러들어왔고,그때그는이미문전걸식을하는10여세의거지소년이되어있었다.그러든어느날구걸은안되고드디어배고픔을못이긴채포목전앞에서기진한채쓰러져정신을잃게된것을주인양반이발견하고급히병원에입원시키고,기운을차린후아예집으로데려가양육하고상업학교까지교육시켜자신의아들과함께포목상을운영하게했던것이다.

드디어해방이되고38선이그어지며정국이어려운때그는큰마음을먹고주인과아들에게하직인사를한채따뜻한남쪽하고도부산국제시장에서포목상을운영하며나날이번창하여이제는방직공장을운영하는사장님이되었던것이다.그날도그는자신의공장에서제조하는직물을직영판매하는국제시장의포목점을가는길에옛주인의아들이자동료였던아들가족을만났던것이다.(이하는감독이나씨나리오집필자가알아서할것.)

덧붙임,

저는아직‘국제시장’이라는영화를보지못했습니다.또자갈치시장은가봤지만국제시장을아직가보지못했습니다.그러나국제시장하면떠오르는두가지단어는기억합니다.첫째,포목가게.둘째,화재

피난민들중에많은사람들이국제시장에서포목상을했던것으로기억됩니다.또한60년대까지만하더라도대형화제는국제시장아니면남대문시장이었습니다.그리고불이났다하면켜켜이쌓아온포목상의명예(?)가하루아침에재가되곤했던그런…썩좋지만은않은기억들.

그런데수십년잊어왔던’국제시장’이라는고유명사가제뇌리를치며다가왔습니다.혹자(특히빨/굉/이들)는이영화를두고사상과이념을앞세워폄하합니다마는,저자신비록어린나이였지만전전세대로서그때를상기하면이영화가시사하는바가크다고생각합니다.

저는이영화만큼은20년도더된영화구경을꼭해야겠다고다짐중닌데다행히윗마을에사시는某교회의권사님(부녀회총무)내외분이내일충주에소재한某멀티관에예매를해두었답니다.

영화를본후나름소개글을올리려생각중입니다마는위의‘반fact반scenario’의썰을국제시장감독인윤제균님께드리며‘국제시장2’를만드시기를권고합니다.요즘같이각박하고메마른세태에우리젊은이들에게625의역사인식과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훌륭한소재가될것이라믿어의심치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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