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일기: 운동

요즘도 초등생 동창들을 만나면 거의 한 갑자 전의 일을 가지고‘그 때 너그들이 울매나 부러웠는지 아냐?’라며 철없는 얘긴지 아니면 아릿한 추억 살리긴지 모를 얘기를 한다. 사실 지들이 부러워했던 우들은 자칫 목숨을 담보로 한 일이었는데…..

피난지에서 나름 철이 들고 학령기에 접어들며 집과 학교가 그렇게 먼 줄 몰랐다. 어른들은 그 거리를 시오 리 길이라고 했고 어떤 양반들은 십 리 길이라고도 했다. 아무튼 그 길 가운데 낙동강 지류인 큰 내가 있었다. 시골학교이긴 했지만 당시로선 상주(경북)읍내에서 가장 컸고 나처럼(우들), 어쩌면 나 보다 더 먼 곳의 골짜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로 전교생이 2000명이 훨씬 넘어 2부제 수업을 했었다.

집과 학교가 멀다는 것은 그만큼 고생이 많다는 의미다. 특히 4계절 중 여름과 겨울은 정말 고생스러웠었다. 그 때는 겨울 추위가 어찌 그리도 맹위를 떨쳤던지??? 하긴 요즘 같이 몰아치는 삭풍을 막아 줄 덕 다운이니 구스 다운이니 하는 방한복도 없던 시절이라 더 추웠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름은 하교 길에 더우면 아예 익지도 않은 고추를 달랑거리며 강물에 뛰어들어 자맥질을 할 수 있었으니 겨울보다는 나았다.

그럼에도 70된 동창생들이 부러워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장마철이 시작되고 갑자기 소나기라도 쏟아지는 날 수업 중에 우들이 사는 골짜기의 아이들은 교단으로 불리어져 냇물이 불어나기 전 하교를 시키는 것이었다. 호명을 하고 하나 둘 교단으로 나가면 남아있는(대다수) 녀석들의 부러운 눈동자 굴러다니는 소리에 교실이 소란할 정도였으니…(그래서 아직도 부러운 추억인가?)

그러나 정작 우들은 싯누런 흙탕물이 쏟아져 내려오면 발바닥 아래의 모래와 함께 금방이라도 떠내려 갈 것같이 기우뚱거리며 그 내를 건너야 했다. 그러든 한 해의 장마철, 마을 분들이 급조한(장마철을 대비한)외나무 다리를 건너던 윗마을 어떤 계집아이가 우리들 눈앞에서 기우뚱 거리다 그 흙탕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따라서 결코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정말 더 힘이 든 것은 장마가 며칠이고 계속 될 때는 내(川)건너는 것을 포기하고 강의 하류에 놓여있는 타 지방으로 드나드는 유일한 시멘트 다리까지 우회하여 학교를 가면 2-3교시수업이 끝날 때도 있었고 오후 수업이 시작되기 전 다시 불리어져 하교를 하곤 했었다.

78년도 면허다. 지금은 없어진 한남동 운전면허시험장 마지막 세대 쯤 될 것이다. 그 후 도봉동이던가? 하는 곳에 생겨나며 이곳저곳 운전면허시험장이 생겨났지만…운전면허를 따고 장롱 깊숙이 박아 두었던 면허증이 효력을 발휘한 것은 82년도 처음 포니1 중고차를 사고서부터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작은 추돌사고 한 번 외에는 이 날까지 대과(?)없이 운전을 해 오고 있다.

문제는 중고차를 구입하면서 부터다. 참 날씬했고 날렵했는데….그 후 배가 튀어나오고 보릿자루처럼 두루뭉수리 해 지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넘어, 거짓말 같지만 지하철이나 대중교통 이용 안 한지가 근 30년이 되 간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일지라도 차를 끌고 나가야 했다.

비육지탄(髀肉之嘆)이라는 말이 있지만 몸이 정말 무거웠다. 뒷골도 땡기고…작년(2016년) 봄 어쩌다 마누라가 가끔 사용하는 체중계에 올라갔더니 세상에…평소의 몸무게 보다 물경10k가까이 무게가 더 나가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다. 장모님 병원 모시고 갔던 날 장난삼아 혈압을 체크해 보니 고위험 군이라는 것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혈압 약을 매일 상복하고 있다.

그나마 농사철엔 어쨌든 몸을 움직이지만 농한기엔 먹고 자고 블로그 질 카페 질하며 책상에 붙어 있으니 받아들인 열량을 소비할 데가 없다. 이러다 일 나지….. 나라 돌아가는 꼬락서니 빼곤 아직 살만하고 그럴 나인데…. 그래서 농사철이 대충 끝난 지난 9월부터 걷기운동을 시작했고 지금은 서울 집에라도 가는 날 외엔 하루를 빼 놓지 않고 하고 있다. 서울 집에 있을 때라도 행장을 차리고 북한산도 오르고 근처를 갈 때도 있지만 역시 맑은 공기 마시며 걷기는 이곳(천등산 기슭)만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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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면소재지 까지는 4.5km 정도…. 어릴 적 학교 다니던 거리와 비슷하다. 농번기엔 농로이지만 요즘은 산책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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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벗어나면 어릴 적처럼 큰 내가 나타난다. 저런 내를 장마철에 맨 몸으로 건너야 했으니…상상이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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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川) 둔덕에 재작년 시에서 산책로 겸 농로를 만들고 천변 2km 에 벚나무를 심었다. 몇 년 후면 장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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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것은 어제 걸은 발걸음 수다.(매일 만보 이상은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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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의 것(암튼…이런 정도의 운동은 매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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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떨 땐 신이나면 이 정도도 걷고 또 걷는다.

 

집에서 면소재지를 왕복하면 대충12000보 좌우 된다.

발걸음 수가 다른 것은 코스를 달리하고 어떨 땐 슈퍼에서

물건을 좀 사기조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 모두 집구석에 처박혀 카페 질 블로그 질은 조금만 하고 운동을 합시다!!!!!

4 Comments

  1. 데레사

    2017년 1월 6일 at 7:40 오전

    나는 벌써 한 시간 걷고 왔어요.
    운동이 제일 입니다.

    • ss8000

      2017년 1월 6일 at 7:35 오전

      음~ 누님 역시 최곱니다.
      운동 운동 하지만 걷기 운동이 최곱니다.
      만수무강 하시고 120수 하십시오. 꼭….

  2. journeyman

    2017년 1월 6일 at 2:45 오후

    만보 걷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던데
    매일 만보를 걷는다 하시니
    저도 좀 분발해야겠습니다. ^^

    • ss8000

      2017년 1월 6일 at 11:45 오후

      아이고! 팀장님요.
      그게 도시 생활에선 정말 힘이 듭니다.

      아직 너무 서둘지 마이소.
      좀 더 인생을 사신 후 한적한 곳으로
      옮기실 때 그리 하이소.

      도시 생활 특히 가족을 부양하는 입장엔
      쉬운 일이 아니고 말고요.

      열심히 살다보면 언젠가 유유자적할 수 있는 그날이 올겝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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