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내가 죽으면 아내와 아이들이 울어 줄까? 나 죽고 난 다음 누가 내 시신 앞에서 울어 준다하여 기분 좋을 것이며, 잘 죽었다고 깔깔거리며 웃는다고 기분 나쁘다며 발끈 일어 날 일도 아닌데, 그래도 울어 줄 사람이 있을지 그게 궁금한 때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부모 슬하에 7남매가 있었지만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며 누가 우는 남매를 못 보았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이미 치매 중증이라 60년 넘게 해로한 서방님의 죽음 같은 건 아예 몰랐고 3년 뒤 어머니의 죽음을 맞았을 때도 7남매 중 누구도 울음은커녕 슬픈 표정조차도 없었다. 다만 딱 한 사람…오열(嗚咽)했던 인물이 내 마누라였다. 하도 신기하여 장례가 끝난 후 어찌된 거냐고 물은 즉, 어머니를 그렇게 돌아가시게(요양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며 그게 후회가 되더라는 것이다.(사실 어머니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집으로 모시자고 주장했던 마누라였고, 그럴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역정을 냈던 나다)
얘기의 핀트가 어긋나지만, 지금 내 장모님이 약간의 치매를 앓고 계신다. 하루에 열두 번 좀 심하면 열세 번도 정신이 왔다 갔다 하신다. 처가 5남매가 모두 지금부터라도 요양원으로 모시자고 하지만 내가 나서서 모실 수 있는 데까지 모셔 볼 테니 좀 더 두고 보자며 반대하고 있다. 그 중 특히 마누라는 더 적극적으로 요양원으로 보내자며 내게 강변을 한다. 그러나 솔직하게 얘기하면 내게 미안해서 그러는 것이지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걸 나는 안다. 어떨 땐 내가 볼까 치매스런 장모님의 행동에 먼저 큰소리를 내고 장모님께 지청구 하는 모습이(일종의 쑈 랄까?)안쓰럽기도 해“그러지 마라! 돌아가시고 난 다음 눈물 짜내지 말고 살아 계실 때 잘해 드려라!”라고 아주 진부한 조언을 해 주면 말은 안 해도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나는 안다. 생색을 내려는 게 아니라 이게다….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유일하게 눈물을 흘려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한다면 너무 억지스러울까?
부모가 돌아가셨음에도 울지 않는 자식들이(우리 남매 빼고 또 있을까?)있기는 하고 또 있다면 무슨 사연 같은 게 있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난 아버지로부터 정말 지독히 맞고 자랐다. 7남매 중 유일하게 그렇게 맞고 자랐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가정폭력을 일삼는 분은 아니다. 어쩌다 강권에 못 이겨 한 잔 술이라도 드신 날은 몹시 괴로워 할 정도로 술을 마시지 못하셨으니 주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유독 내게는 그렇게 엄하셨다. 보통 넘어갈 일도 체벌을 반드시 하셨다. 내게만 아버지 사전에 용서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원인은 내게 있었다는 걸 나는 안다. 가끔 하는 얘기지만 고등학교를 다섯 군데 옮겨 다닐 정도였으니 어쩌면 아버지는 나로 인해 속이 까맣게 타셨을 게 분명하다.
그런 아버지 돌아가시고 집 한 간 있는 거 막내 동생 놈이 70% 나머지는 형님과 시집에서 쫓겨나 방황하는 여동생이 찢어발기고 그 외엔 아예 고린 동전 한 닢 구경 못했으니 그 섭섭함(?)에 눈물이 안 나왔겠지만 유산을 찢어발긴 남매는 억지로라도 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자식을 7남매나 주저리주저리 낳았건만 죽음을 맞이하여 울어주는 새끼 하나 없다는 건 뭔지…가신 양반의 삶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닐지??? 아니면 부모가 돌아 가셨음에도 눈물 한 방울, 억지로라도 곡(哭)한마디라도 않은 새끼들이 불효막심한 것인지???
워낙 가진 것 없으시고 남긴 게 없으니 나누어 줄 것도 없으셨을 게다. 그런데 누가 갔다 놨을까? 영정사진 밑에 낡아빠진 돋보기안경이 하나 놓여 있다. 분명히 아버지 즐겨 끼시든 돋보기다. 그게 어째 내 눈에 띄었을까?
마흔 중반 넘어서며 돋보기 없인 글을 읽을 수 없었다. 이미 이런저런 돋보기를 수도 없이 사들였음에도 그날 아버지의 돋보기가 탐이 났다. 무슨 대단한 물건이라고 남매 중 누가 먼저 가져 갈 것 같아 노심초사 하다가 기회를 타 몰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찌된 건지 돋보기를 살 때 안경점에서 검안을 하고 구입했지만 아버지의 돋보기만큼 내 눈과 맞는 게 없었다. 몇 년 그것만 애용하다 보니 한쪽 다리가 부러졌고 수명을 다했으니 어디 처박아 두었는지 기억도 없었는데, 약 달포 전 서울 집 컴퓨터 책상서랍을 뒤지다 부러진 아버지의 유일무이한 유품 돋보기를 찾았다.
마누라에게 남대문 근처 안경점에 수리를 하라고 부탁을 했는데 깜빡 했던 모양이다. 지난 주 수리한 안경을 내 놓는다. 워낙 낡은 것이라 새로 하나 장만 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시아버님 유품이라 그런다고 했더니 원래 수리비 만원은 주셔야 하지만 그냥 가져가라고 하더란다. 그냥 올 수 없어 남대문에서 젤 잘 팔리는 호떡 몇 개를 사다 주었단다. 나 죽고 난 뒤 울어 줄 식구라도 있을지? 엄한 얘기 하고 말았다.
銀으로 된 것이라 탐이 난 것일까? 지금도 어떤 돋보기 보다 내 눈에 딱 맞는다.
카스톱
2017년 1월 26일 at 9:11 오전
가슴 한 켠이 먹먹해 오네요~
ss8000
2017년 1월 27일 at 4:49 오전
부모 은공을 너무 늦게 깨닳은 후회 같은 것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다가
나이 70이 되니 자식들이 두려워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름 집안을 잘 꾸려 왔다고 생각은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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