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들어 이웃과 친인척들의 사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을 때다. 다른 누구보다도 작은 집과 사촌들의 모습이 정말 부러웠다. 그 부러움의 끝에는 얼마간의 분노 같은 게 분명이 맴돌았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버지는 그런 쪽으로 한 말씀 없으셨지만 아니 언제나 생활의 고통이 집안을 내려치고 지나간 다음 넋두리처럼 그런 얘기들을 끄집어내는 어머니에게 호통으로 대신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가끔씩은 보았다.
5남매(2남3녀)의 맏이인 아버지는 무기력한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찍이 가장이기도 했었단다. 3.1운동이 일어났던 해에 세상에 나오셨으니 꼼짝없는 일제강점기 때 청. 장년기를 맞아 말도 못하는 고생을 했지만 동생 하나라도 제대로 교육시켜 보겠다고 작은아버지를 보성전문에 보냈고, 작은아버지는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식산은행(산업은행전신)에 당당히 취직을 했단다. 그리고 고향땅 토호의 딸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으니 그 분이 우리작은어머니다.(재작년 돌아 가셨다)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내 눈에 비친 작은집의 생활은 그야말로 초호화 생활이었다. 그즈음 산업은행(60년대나 지금이나 신이 부러워한다는 국책은행)고급간부의 지위에 오른 작은아버지는 운전사가 딸린 자가용을 타고 다닐 정도로 부유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형님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지방법원 말단 서기로 재직하던 아버지로서는7남매를 건사하기가 벅찼고 결국 나의 형님과 누님은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늘 그게 불만이었다. 나의 형님으로 치면 우리집안의 장손임에 그 장손이 찌든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함에 이르렀어도 학비 한 푼 대 주지 않는 시동생이 야속하다며“내가 신혼시절 너 삼촌을 단간 방에 생활하면서도 학교를 보내고 뒷바라지를 해줬는데…“로 시작하는 넋두리가 시작되면 어느새 어머니의 두 눈가가 촉촉이 젖어오곤 하는 걸 수도 없이 목격하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혹시라도 그 자리에 아버지가 있는 날은“저 여편네가 죽을 때가 된 모양이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시는 것이었다.
사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 보다 한 살 위인 파락호(나와는 잘 어울리며 개구신 노릇 또는 말썽을 자주 피웠다)같았던 사촌형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사촌인 우리를 차갑고 인정머리 없이 대했다. 어쩌다 작은집엘 놀러갔다 돌아올 때 나는 골백번도 더 마음속으로 다졌다.“요오씨~!!난 크면 작은집만큼은 살고 말거야!!!”어쩌면 이것은 분노 같은 다짐이었던 것이었다. 지금 그 다짐을 이루었는지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노를 분노로 끝내면 나만 손해다. 분노의 끝에는 어떤 목적 설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것 없이 분노만 계속하면 옹졸한 질투일 뿐이다.
내가‘일본을 배우자!’라는 연재를 올리자 어떤 이가 댓글을 달아 오기를…….
강자의 양보는 미덕이지만
약자의 양보는 비굴해 지는 거라고 합니다
진정 일본이 강자의 심정으로 사과를 한다면 우리도 깨끗하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게 맞다고 봅니다
허나
일본은 정권이 바뀌곤하면 한번씩 (의도적인 거 같은 느낌이 듦)
염장을 지르는 말들을 하니
그때 마다 우리가 발끈하는 겁니다
우리의 힘을 키워서 일본을 능가하고 오히려 우리가 그넘들에게
타이르는 국력이 있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아직 우리가 힘이 없고
그넘들을 이길수 없으니깐 소녀상이라는 상징물로
다시금 잊지 말자라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저넘들이 지속적으로 독도를 도발 하듯이
세월이 흘러 흘러 몇백년이 지난뒤에
저넘들은 지들 조상이 자기네 땅이라고 떠들엇던것을 끄집어 내서
봐라 우리땅이 맞지 이럴 명분을 쌓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도 소녀상을 이렇게 설치하는 것도
잊지 말자라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런 답글을 달았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얘깁니다.
누가 강자고 누가 약자지요?
그래요. 나 보다 강한 깡패 같은 이웃이 있다고 칩시다.
한 번 된통 맞았습니다.
싫든 좋든 진심이든 가식이든’사과해!’하니 사과 했습니다.
병원비며 보상까지 받았어요. 근데 만날 때마다 소소한 거 ‘너 왜? 내 여동생에게 히야까시 했어?’라며 시비 겁니다. 그 깡패가 가만있겠어요?
어쨌든 보상까지 하며 합의를 했잖아요.
어쩌자는 겁니까?
깡패 이웃을 자극한 건 바로 못난 놈 우리입니다.
꼴에 자존심은 있다고 앙알거려 보지만 깡패는 태산 같아요.
치유 방법이 뭔지 압니까? 당장은 없어요.
세월이 약이랍니다.
중국 놈들에게 수천 년 압제를 받았지만
지금은 끽소리 안 합니다. 약자의 양봅니까? 비굴입니까?
그 아픈 세월이 수천 년 내려오며 희석 된 거지요.
약자의 양보가 비굴하다는 건 개 소립니다.
힘도 없는 놈이 앙알거리면 뭣합니까?
용서로 승화 시키는 거지요. 그리고 그들이 강해 진 이유를
배워 나가자는 게 곧 극일(克日)입니다. 극일이라는 게 씨름으로
스모로 한 판 승부 즉 힘으로 우위를 점하자는 건 아닐 것입니다.
경제부흥을 이루고 이본 보다 더 잘산다고 하여
극일은 아닐 것입니다. 극일을 하려면 그들을 제대로
알고 대처하는 데 그 방법이 나올 것입니다.
아직도 철천지원수 불공대천의 원수로 삼아서는
극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등신 같은 지도자도들도 하지 못한 걸
‘박근혜’가 해 냈어요. 그 기초를 아버지 되시는 박정희 대통령과
그녀가 닦았습니다. 그것을 기반 하여 극일의 길을 갔어야 했습니다.
그걸 또 정신대 상인지 뭔지…일본을 약 올린 겁니다.
그래서 얻은 게 뭐지요? 천 개 만 개 온 나라를
그런 허접한 상징물로 도배를 해도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일본은 어쩌면 이렇게 못난 짓을 하는 우리를 조롱하고
비웃으며 재미있어 하고 있습니다.
미흡한 사과와 보상일지라도 이쯤에서 그치는 게
우리에게 훨씬 유리한 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