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농번기다. 며칠 전 대충 이런저런 작물의 파종을 끝내고 몇 가지는 5월 초에 하려고 계획해 두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간 짬이 난다. 농사일도 일이지만 국가의 중대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일일이 전화로 할까?’ 그러나 국가의 중대사를 그렇게 가벼이 다룰 수 없다는 생각에 상경하기로 했다가 그 새벽길에 38국도에서 고라니 한 마리를‘로드 킬’하며 애마의 면상부분이 깨지는 사고를 당했지만, 이게 다 좋은 일에 앞선 액땜이라고 고쳐 생각했다.
솔직히 처음부터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탐탁하지도 않을 뿐 도저히 가망이 없어 포기한상태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게 아니다. 자신감은 물론 확신이 붙어 간다. 그래서 원행(상경)을 결심한 것이다.
마누라와 3남매의 짝꿍 그리고 나, 여덟 표다. 그리고 내 얘기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는 처제(동서 놈은 아랫녘이라 말을 잘 안 듣는다)또한 게시판에 이런저런 썰을 끄적이다 우연히 조우한 생질녀와 큰딸 친구 희선이. 이상 십 수표는 때려죽인대도 변치 않을 것을 장담한다.
‘오늘 다들 모여라!’ 이 한마디면 아무리 바쁘거나 짬이 없어도 모인다. 일(?)이 생기면 가끔씩 모이는 모처의‘샤브샤브 집’으로 시간을 정해 주었다. 어제는 마누라와 3남매의 짝꿍 그리고 나, 일곱만(물론 친손녀 예솔이 쌍둥이 외손녀도 대동)모였다. 산골을 떠나기 전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큰딸아이에게는 미리 카카오톡으로‘밴쿠버’에 기표소가 있는지 확인하고 꼭 참석하라고 엄명을 내리며 확답을 받았다.
예약한 상차림이 분주한가운데‘에~! 뭐 다들 이미 짐작했겠지만…오늘의 모임은 다음 달에 있을 대통령 선거 때문이다. 긴 얘기 않겠다. 이 늙은 애비 어미 이 나이에 이민 안 보내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주위의 동료들도 확보 하고“xxx”를 꼭 찍어라! 알았나!?’. 길지 않은 훈시에‘당연히 아버지(님)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는 답을 받고 각자의 집으로 흩어진 게 어제 저녁의 상황이다.
잃어버린 10년 세월을 보내며 정말 많은 고민과 갈등을 했었다. 이런 나라에선 살 수 없다는 그런 생각. 근간 젊은 아이들 속에‘헬 조선 헬 조선’ 하지만, 나는 그때 이미‘헬 조선’탈출을 꿈꾸고 기도 했었다. 그때 마누라의 손을 잡고 찾아 간 곳이 지구의 반대쪽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었다. 보름 가까이 두 나라를 비교 검토한 결과‘아르헨티나’로 낙점을 했다. ‘그래! 노후는 이곳으로 정하자! 그리고 함께 하겠다고 하는 아이들은 함께 하자.’
그러나 그때도 조건은 있었다. 당시 17대 대선 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2007년 11월 하순이었다. 이명박과 정동영의 대결이 있었던 해다. 잃어버린 10년 세월을 경험한 나는, 만약 보수정권(이명박)이 패하면 무조건 내가 먼저 혼자라도 그곳으로 나를 생각이었는데 천행으로 보수정권이 압승을 거두고 정권탈환을 했기에 주저앉았던 것이다.
그리고 2-3년을 지난 후 여전히 나라가(특히 이명박 정권 때 세계적 경제 한파가 밀려 옴) 1년 365일 조석으로 시끄러울 때 다시 내 마음 속엔‘헬 조선 탈출’의 기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당시 갓 결혼한 둘째 딸아이 부부를‘아르헨티나’로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보내고 2-3년 뒤 우리 부부가 따를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민을 갈 팔자가 아닌지 이런저런 수속을 개시하는 과정에 그만(?) 작은딸아이가 쌍둥이를 수태하고부터 그 계획은 유야무야 되고 말았던 것이다.
벌써 10년 세월이 흘렀는가? 그 땐 갓60이 되던 해였다. 지금에 비하면 몸도 마음도 의욕도 펄펄 날던 때였다. 아프리카의 정글 속에서도 고비나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가 있어도 살아나갈 자신 같은 게 있었다.
10년의 세월이 흐르며 지구촌의 여러 국가(주로 선진국)를 둘러보고 체험했지만 그래도 이 나라 내나라 같은 나라가 없었다. 비록 핵을 머리에 이고 살고, 휴전이 깨지고 전쟁이 언제 재개 될지 몰라도 불안하거나 초조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철 아니 종북 좌파의 준동이 나를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핵폭발이나 전쟁의 위험이 아니라 70을 살아오며 간직한 국민의 자존심 때문이다. 조폭에게 돈을 바쳐가며 장사를 한다는 게 얼마나 자존심 상할까? 평화를 돈을 주고 산다는 게 얼마나 자존심 상할까? 나와 가족은 그 자존심을 지키려 드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이제 언제가 될지 모르는 이 나라를 떠나고 싶지 않다. 정치만 바로 선다면 이 나라만큼 살기 좋은 나라는 지구촌 어디에도 없다. 40여 개국을 다니며 느낀 나만의 소회다.
‘다들 모여라!’ 어제의 모임은 그래서 가진 것이고 그 자리에서 외침은 ‘나 이민 가고 싶지 않다!!!’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