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평생 피란(避亂)기를 빼곤 종로를 떠나 본 적이 없다. 물론 종로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몸은 이곳 충분 제천에 있지만 주소지는 아직도 종로에 있다. 피란생활을 끝내고 환도 이후 세상 물정이 점차 눈에 들어올 때 종로 거리엔 앞뒤가 두루뭉수리 모진데 없는 공용버스(현대 보다 먼저 생긴‘하동환 자동차’였던가 그랬다)와 전차가 꽥꽥 거리며 다니는 사이로‘시발택시’라는 이 나라 최초의 승용차가 가끔 눈에 뜨이는 정도 아니면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민간에게 불하한 GMC군용트럭이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요즘 사람들이야 애어른 막론하고 몇 백 미터의 거리도 자가용으로 드나들지만 그땐 차비(버스 1.5원, 전차 1원)라도 아낀다며 보편적 도보로 목적지를 왕래 했었다. 나 자신도 북촌 가회동에서 만리(봉래)동에 소재한 학교까지 걸어 다녔고, 어쩌다 날씨가 불순한 때만 공용버스를 서울 역까지만 이용하고 염천교를 건너 등하교를 했다. 거리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지금 그렇게 하라면 아마 혀부터 내밀 것이다.
오늘의 산골일기를 써 내려가는 주제의 그날, 반세기도 훨씬 넘는 하교 길에 나는 그 분을 목격했다. 지금은 없어진 남대문초교(지금의 상공회의소 본관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 됨)를 지나 중앙산업(지금도 이 회사가 존재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삼성본관에 자리한 시멘트 전봇대 또는 흄관 등 건설자재를 제작하는 업체), 그쯤을 지날 쯤 내 뒤쪽으로 지나는 행인들이 소리를 친다.‘야! 이병철이다.’
이병철, 부자의 상징, 부자의 대명사 귀에 딱지가 안도록 들어온 이름을 대한민국에서 제일 넓은(지금은 모르겠지만..)도로 한가운데서 들은 것이다. 말로만 들었지 단 한 번도 그림자조차도 보지 못했던‘이병철’을 그 거리에서 만난 것이다. 그 외침에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까맣고 정말 날렵하게 생긴 자동차 한 대가 쌩하니 저만큼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병철은 고사하고 그림자도 아닌 이병철이 타고 있다는 차만 봤지만, 난 이병철 보다 더 쌩하니 달아나는 차에만 관심이 있었다. 매일 두루뭉수리 한 버스나 대충4각형을 유지한 시발 그리고 힘겨워하는 낡은GMC트럭만 보다가, 그 날렵함이란 멋지다는 표현으로 모자라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가 그런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을까? 아무튼 나는 이병철이라는 대부호보다 그 차의 아름다움에 매료(魅了)되고 말았다.
그 뿐 아니다. ‘앗 이병철이다!’를 외친 어른들의 말은 계속 되었다. “저게 말이야! ‘벤츠’라는 건데, 차 안에서 만년필로 글씨를 써도 괜찮고 물을 컵에 따라 놓아도 쏟아지지 않고 아무리 험한 길도 흔들리지 않는대.” 하기는 그들이라고 타 보기를 했겠는가 아니면 가까이서 만져보기를 했겠는가. 그들도 들은풍월이 틀림없었고 역시‘이병철’의 얼굴을 알고 외친 게 아니라 그 양반이 탄 차를 알아보고 그리 외친 것 또한 틀림없다.
찰나적 순간이지만 날아갈 듯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진 천상의 여인 같았던‘벤츠’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엉뚱하게도“음~! 요오씨!(그 때만하더라도 일본의 잔재가 남았음. 양해 바람)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내(나), 저 벤츠 꼭 한 번 타고(소유)말 것이다”라는 다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짐이란 항상 하지 않으면 느슨해지고 잊혀지는 것. 성인이 되고 장가가고 아이들 키우고 먹고살기 바쁘고…반세기 훨씬 전의 다짐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린 지가 언제인지 모른다.
덧붙임,
나는 지금 한 장의 사진을 두고 몹시 갈등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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