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렴(李章濂), 본관은 전주(全州)이씨. 자는 제경(霽卿)이다. 무관이다. 1859년(철종10년) 황해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1866년(고종3년) 병인양요 때 진무사(鎭撫使)가 되었고, 1868년에는 병인양요로 한때 함락되었던 강화부(江華府)의 유수(留守)가 되어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1869년 금위대장(禁衛大將)이 되어 대원군의 군사 관련 부문의 자문에 응하였으며, 한성(漢城)을 중심으로 한 서북부의 수도 방어에 힘썼다. 그가 금위대장이 된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대원군 이전의 이하응은 몰락한 왕족으로 개차반처럼 행동했다. 혹자는 세상의 눈을 속이기 위한 나름의 수단이라고 평가하지만, 어쨌든 그의 젊은 시절은 파락호나 다름 아니었다. 매일 기방을 드나들고 무전취식을 하거나 방귀 꽤나 뀌는 양반네들과 시비를 가리며 생활했다.
그러던 어느 날도 이하응은 어느 기방에서 무전취식을 하며 추태를 부리다 금군별장으로 있던 이장렴과 부딪히게 된다. 이장렴이 처음엔 그래도 명색 왕족인 이하응에게 좋은 말로 자제를 요청하며 말렸으나 성질이 오른 이하응이 큰소리로 꾸짖었다“그래도 내가 왕족이거늘…감히 일개 군관 따위가 무례하구나!” 라고 외치는 순간 이하응의 눈에 별이 튀었다. 이장렴이 이하응의 귀쌈을 후려치며“한 나라의 종친이면 체통을 지키시오! 이렇게 무전취식을 하며 추태부리며 왕실에 누가 돼서야 쓰겠소? 이 몸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감의 뺨을 때린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세월이 흘러 이하응의 신분이 일국의 임금님 아버지요 흥선대원군이라는 감투를 쓰고 이장렴을 운현궁으로 불렀다. 이장렴은 흥선대원군의 부름을 받고 운현궁에 가기 전 가족을 모아 놓고 이 길이 마지막 길이라며 유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장렴이 궁에 도착하자마자 흥선대원군은 눈을 부릅뜨면서 물었다.“그대가 이 자리에서도 내 뺨을 때릴 수 있겠는가?”이에 이장렴은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거침없이 대답했다.“대감께서 지금도 그때와 같은 못된 술버릇을 갖고 있다면 소인의 손을 억제하지 못할 것입니다.”이장렴은 죽기를 각오한 대답이었다.
이장렴의 말이 끝나자마자 호탕한 대원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내 오늘 그 술집에 다시 가려고 했는데 자네 때문에 안 되겠군.”연후에 대원군은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내가 정말 좋은 나라의 동량을 하나 얻었다.”그날 대원군은 이장렴을 극진히 대접하고 그가 돌아갈 때는 친히 문밖까지 나와 배웅하며 이르기를“시임 금위대장 나가시니 앞을 물리고, 중문으로 모시도록 하여라.”
청와대가 안현호 전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의 일자리수석 내정을 철회한 것으로 1일 확인됐다는 것이다. 청문회에서 정작 자격 없는 국무총리는 갖은 모략과 수단을 동원해서 인선을 하고 전전 정부 때의 인사로서 현 정권지지 세력에 반대의사를 표 했다고, 그리고 황제 노총이 내정 철회를 요구하며 반발한다고 결국 낙마를 시키며, 딱 한마디 ‘청와대 인사검증에서 걸렸다’라는 말로 잘라냈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을 현 대통령 따위에게 비유 한다는 게 언감생심이겠으나, 대통령의 인사는 어느 정권이든 고유의 업무이고 솔직히 언터쳐블 권한이다. 지가 지 사람 쓰겠다는데 왈가왈부 할 이유는 없겠으나 문제는 문재인이 대통령 당선 되자 각계에서 대통령 당선 시킨 공로를 앞세워 빚 갚으라는 요구가 비일비재 하는 모양이다. 대통령이 되어 국정을 다스리기 보다는 남은 세월 빚잔치가 국정의 가장 큰 일거리가 아닐까 심히 저어되어 해 보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