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고추농사로 큰 재미를 본 것은 없지만 그래도 푼돈을 만졌기에 은근히 욕심이 생겨 작년 농사 배의 고추모종을 마을 노인회장께 부탁을 드렸다. 지난 3월 초든가? 아직 고추모종이 자라기 전에 노인회장님 댁의 밭 앞을 지나는데 무엇인지 촘촘히도 놓여 있다. 얼마 뒤 회장님을 뵐 기회가 있어, 궁금한 나머지 여쭈어 보았더니‘유기농 거름’이란다. 나도 똑 같은 거름을 밭에 시비를 하지만 워낙 상상 이상의 거름포대를 놓아두었기로‘아니!? 무슨 거름을 그리 많이….’라며 놀라워하자 회장님 껄껄 웃으시며‘고추와 옥수수는 거름을 아무리 많이 줘도 싫어하지 않는다.’라고 하시는 거다. 초보 농사꾼 그래서 하나 배웠다.
시간이 지나고 회장님께 주문한 고추모종도 인수하여 안 죽을 만치 고생을 해가며 고추를 심었다. 말뚝도 박고 농약도 주고 남들 하는 대로 눈치껏 따라하며 영농을 해 나가는데, 울 건너 이 반장 형님 고추밭에 시비(施肥)를 한다. 농사란 다 때가 있는 거, 남들 할 때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그래서 나도 농협에 가서 복합비료를 사다가 시비를 하기 시작했다. 원래 비료를 줄 때는 모든 작물의 모종과 모종 사이 중간 쯤 한 스푼 정도의 비료를 주어야 한다. 작년까지도 그렇게 해 왔다. 처음 300포기쯤은 예년처럼 정석대로 중간에 비료를 주고 있었는데, 금년엔 고추의 양이 작년의 배 이상 거의 3천 포기다. 남은 밭고랑을 보니 앞이 캄캄하다. 그런데 그 순간 회장님의 조언이 생각난다.“고추와 옥수수는 거름을 아무리 많이 줘도 싫어하지 않는다.”라는 말씀.
옳거니, 꾀도 나고 앞이 캄캄하던 차에 거름을 아무리 많이 줘도 싫어하지 않는다면 멀리 떨어져 줄 게 아니라 가까이 주면 확실한 효과가 있을 거란 생각이 스친다. 한 골 정도 생각대로 고추모종 북돋운 곳에 뿌려 주었더니 시간과 수고가 10분의1도 안 든다. 기분이 째진다. 세상에 이렇게 쉬운 것을…왜 그동안 그 고생을 했단 말인가? 후회해 본들…. 사람은 역시 배워야 한다. 노인회장님의 지나가는 말씀 한마디가 예수님이나 부처님 복음 같을 줄이야….
다음날 고추밭엘 가 보았다. 가뭄 탓도 있겠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빌빌대며 고추모종 본연의 자세에 충실하지 못했던 것들이 하루 밤 사이 팔팔하게 살아났다. 세상을 얻은 것처럼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문재인이 부럽지 않았다. 이제부터 나는 부농이 되는 거야! 얼마 전 계획했던 대로 벤츠로 애마를 바꿔 탈 수 있다는 희망과 꿈이 부풀어 올랐다. 사람이 어떤 희망에 젖으면 평소에 않던 짓을 하는가 보다. 그 다음 날도 고추밭에 가보니 나의 꿈을 영글게 해 주는 고추모종들이 푸르다 못해 찬란하기까지 하다. 저 푸른 초원이 아니라 고추가 잘 자라고 있음을 확인한 후 며칠 간 그 아이들에게 신경도 안 썼다. 워낙 푸름을 자랑했으니까.
한참 집 앞의 문전옥답에 심은 다른 작물들에게 물을 주고 있는데 전화벨이 요란을 뜬다. 윗집‘최공 아우님’이다. 다짜고짜“형님! 빨리 올라와 보셔! 고추가 왜 이래?(최공의 집은 내 고추밭 바로 앞에 있다. 그는 그날 산딸기를 따러 내 고추밭 앞을 지나다 그 광경을 목격했단다.)”최공의 그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전혀 불리한 상황 따윈 생각조차도 없었다. 다만‘빨리’라는 그의 표현이 께름하여 하던 일을 멈추고 매일 보는 천등산 산세와 주변 환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고추밭으로 가 보았다.
고추밭을 보는 순간 다른 건 다 관두고 마누라의 노여운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아! 이일을 어쩌란 말인가? 이 노릇을 어찌하란 말인가? 전 전날 내린 비가 고추의 푸르름을 더욱 짙게 할 줄 알고 아예 거들 떠 보지도 않았는데… 그날의 그 빌어먹을 몇 방울의 비가 땅 속으로 스며들며 뿌려 논 비료가 고추뿌리에 닿은 모양이다. 고추가 완전히 황달병 걸린 것처럼 노랗게 타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긴 얘기 해 봐야 그렇고…. 잔 꾀 부리다가 금년 농사 개판 아니 아사리 판 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초창기에 일찍 발견 했기에 망정이지 고추가 익어갈 무렵이었다면 우리 마누라 노발대발 이혼 하자고 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 나이에 정말 황혼 이혼 당하면??? 누가 나같은 늙다리를 받아 주겠는가.
오늘의 일기 마쳐야 겠다. 끝으로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 마누라 지난 토요일 이곳에 왔다. 이 사실을 숨겨야 하나 이실직고를 해야 하나? 솔직히 갈등 했다. 시간을 좀 더 두고 사실을 밝힐까? 아니면 아예 모른 채 할까? 그러나 아니다. 이제 몇 년 만 더 지나면 금혼식을 할 만큼 함께 했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한단말가.’부인 내 말 좀 들어 보오! 이만저만 하여 고추가 절단이 나고 말았소 부인!’하며 이실직고 했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마누라 왈, “까짓 고추 타들어가거나 말거나‘자기’ 몸 아끼지 않고 심은 그 정성이 아깝지 다른 거야 뭐…. 괜찮아! 우리 공부했다고 칩시다.” 이 말에 감동 안 먹으면 당신들은 인간도 아니다. 뭐…..
우리 마누라 하나라도 살려 보겠다고 이리저리 살펴 보지만 난 그게 더 안타깝고 가슴 저려 온다.
죽은 자식 거시기 만지는 거 같아….차라리 내 뺨을 치씨요!!!마누라! 그만해! 그럴수록 나 심장 쫄아 등게로….-.-;;;
김수남
2017년 6월 7일 at 11:01 오전
정말 너무너무 마음 아픕니다.선생님의 그 안타깝고 아픈 마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시골에서 농사 지으시는 부모님 모습을 늘 봐 왔기 때문에 농작물 하나하나가 다 자식 못지 않은데요.무엇보다 사모님께서 선생님께 그렇게 잘 말씀해 주신 것이 또한 감사합니다.
평소에 말씀은 별로 없으시고 잘 표현하시지 않으신다 싶으셔도 이렇게 정말 꼭 필요하신
말씀은 제 때 잘 하시는 지혜로운 아내를 얻으신 선생님도 복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영농 수업료를 톡톡히 치루셨다 생각하시고 또 좋은 경험을 삼으신다 생각하시면 훨씬 마음이 편해지실 것 같습니다.모종이 더 있으면 지금이라도 고추를 심어도 될 시기이면 좋겠습니다.혹시 그렇지 못하면 대체 농작물이라도 그 자리에 잘 심어지면 좋겠습니다.
사진 속의 고추 보니 저의 마음도 표현할 수 없이 많이 아파옵니다.너무 불쌍히 가버린 고추이기에요…
ss8000
2017년 6월 7일 at 5:08 오후
너무 마음 아파 마십시오.
다행히 고추 농사에 목숨 걸지 않고 있답니다.
단지 땅이 좀 남아 돌기에 그냥 놀릴 수 없어 재미로
그리고 운동 삼아하는 거랍니다. ㅎㅎㅎ…
다른 작물 심기엔 늦었고 그나마 얼마 간은 심심풀이 할만큼 살아남았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