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병과는144 측지병이다(지금도 그런진 모르겠고…). 자대에 배치되고 얼마지 않아 BOQ를 거쳐 장군님 따까리로 3년을 때웠으니 측지가 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소위 제대를 3-4개월 앞 둔 어느 날이었다. “오병규! 따블빽 싸! 그리고 개인화기도 챙기고…”어느 날 관사에 있는 내게 느닷없이 본부 포대장이 들이닥쳐 이런저런 생각할 여유조차 주지 않고, 그야말로 출기불의(出其不意)로 관사 앞에 대기 시켜 둔 사령관6호차(전투차량)에 태우더니 꼬불꼬불 산 넘고 물 건너 몇 시간을 달리더니 예하대대(군단포155mm)CP에 날 턱 내려놓는다. 그리고 잠시 후 대대장이 나타난다.
당연히 낯이 익은…나와는 약간의 감정을 가진 대대장이다. 사령관 관사에는 가끔 더 높은 양반(별들의…)들과의 파티(회식)도 있지만, 예하 부대장들과의 친선도목도 자주 가졌다. 주로 부부동반을 했는데 예의 그 대대장이 모모한 일로 내 눈에 벗어났다. 일반사회도 그러하지만 군인사회(특히 장교)는 계급승진 계절이 되면 숙소의 딸딸이는 매일 숨이 넘어 간다. 물론 사령관에게 인사고과의 줄을 대기 위한 것이다. 밉보인 그 대대장 숙소로 전화가 오면 사령관님이 계셔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안 바꿔 주기도 했던… 어쩌면 악연이 있는 대대장이다. “새에키~! 무슨 잘못을 저질러 여기까지 왔어!?”, 그러나 난 할 말이 없었다.
정말 서러운 건 사령관 따까리를 했다고 같은 사병들은 날 인간 아니 군인취급을 안 했다.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왕고참임에도 새카만 일등병도 반말은 여사고(그 때 군대 참 足같다고 아파하고 괴로워했었다.)나와는 제대날짜가 비슷한 동기 급은 아예 졸병취급을 했다. 결국 나도 모르는 죄업을 쌓은 탓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전출을 간 예하대대에선 내가 할 일이 없었다. 전방의 추위가 좀 심하던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밀려왔다. 더 괴로운 것은 아침점호시간이다. 체력단련 시간이라며 태권도 대형으로 벌려! 라는 구호가 떨어지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돌부처였던 것이다. 아침마다“저! 병신 새키 저거..!”정도는 그냥 노래 가사 같았다. 그 때 처음 내 머리 속에‘탈영’이라는 단어가 맴 돌았다. 한마디로 죽지 못해 연명하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부대가 화천의 사방거리라는 민통선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탈영’을 하려면 15, 27, 7이라는 사단의 위수지역의 헌병대를 무슨 수로 벗어나겠는가? ‘탈영’은 언감생심이었다. 솔직히 그럴 용기도 없었고. 일주일인가 열흘인가? ‘탈영’이라는 턱도 없는 상상의 단어를 머릿속에만 넣고 있을 때 이번엔 대대CP로 오라더니 또 따블빽을 싸란다. 따블빽을 싸들고 간 곳은 20X GP였다. 그곳이라고 내가 할 일이 있었겠는가?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엔 전기가 없어 대북방송을 하려면 휘발유용 발전기를 돌 릴 때였다. 결국 그곳에서 내가 할 일은 이런저런 허드렛일로 시간을 때우고 사흘이 지나자 다시 대대로 원대복귀를 하라는 것이었다.
원대복귀를 한 며칠 후 다시 군장(따블빽과 M1소총이지만..)을 챙기라더니 갓 임명받은 ROTC출신 중위와 황학산이라는 곳에 위치한 OP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 때 주워들은 얘기지만 OP엔 4/1즉 포병장교 한 사람과 포병(무전병, 작전병들..)병사 넷이 가는 곳이고, 그런 가운데 미리 밝혔지만 측지병(144)은OP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사실 GP나 OP의 포병들은 불침번이나 보초 설 일은 없었고 누구 말 짝으로 세상에 그렇게 편한 곳이 없었다. 그렇게만 군대생활 하라면 시쳇말로 말뚝이라도 박을 것 같은…. 하지만 가당치도 않은 얘기고….
제대를 명받고 대대장에게 신고하던 날 대대장은 그랬다“새에키! 탈영 않고 용케 참았네! 사회에 나가거든 인내하는 정신으로 잘 사라기 바란다.” 속으로 욕이 저절로 나왔다“c8!…그렇게 뺑뺑이 돌려놓고…” 제대특명을 받고 얼마지 않아 이 모든 게 마지막 사령관의 농간이었다는 걸 알았다. 탈영할 것 같아 예하대대로 보냈지만 그도 안심이 안 되어 GP로 올렸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철책을 넘고 북쪽으로 넘어 갈 것이 또 걱정되어 철책과는 거리가 있는 OP로 올렸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대대장의 잘못은 아니었던 것이다.
덧붙임,
아무리 줄이고 줄이려고 해도 썰이 길어진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미리 얘기해 두지만 제대를 하고 난 나를 그렇게 뺑뺑이 돌린 사령관 집(구파발)을 찾아갔었다. 당시엔 귀했던 ‘죠니 워커 블랙라벨’을 한 병 사들고. 사령관이나 사모님으로부터 사과씩은 아니더라도 차라도 한 잔 얻어먹으며 응어리 진 것을 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 한 잔 마시고 모든 걸 잊고 반세기 가까운 오늘날 이런 썰을 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사령관은 나를 그런 식으로 뺑뺑이를 돌렸을까? 내일로….
구천상분(句踐嘗糞),과하지욕(誇下之辱)을 아느냐?(1부)
오월 대전에서 참패한 월왕 구천이 오나라에 인질로 갈 때 그의 곁에는 월부인과 재상 범례 양인뿐이었다. 오나라로 압송되어 간 월왕 구천은 상반신을 발가벗고 무릎으로 기어서 오궁 앞에 꿇어 엎드렸고 월부인 또한 남편이 하는 대로 따라했다. 오왕 부차는 월왕 부부를 선왕 합려의 무덤 곁에 석실을 만들어 밤이면 묘지기를 시키고 낮에는 말을 기르게 했던 것이다. 때로는 부차가 행차할 때면 부부가 함께 기꺼이(?)부차의 말구종노릇도 하며 그렇게 세월이 한3년 흘렀을 때 오왕 부차가 병이 나자 구천은 몸소 부차의 똥을 핥아 맛을 보고 부차의 완쾌를 점쳐준다. 이 과정을 고사에서는 구천상분(句踐嘗糞)이라고 한다. 즉, 월왕 구천 똥 맛을 보다. 그 일이 있고3일 후에 구천은 오왕 부차로부터 구금이 해제되어 귀국 길에 오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얘기하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는 한참 뒷날의 일이다. 명색 일국의 왕이 적국 왕의 똥을 맛 봐가며 수모를 참았고 종래엔 자신에게 수모를 준 오나라와 그 왕 부차를 멸망시킨 것이다.
어제도 잠시 어떤 썰에서 인용했지만, 초한(楚漢)쟁패의 명장 한신이 시정잡배의 사타구니 밑을 기어지나간 과하지욕(誇下之辱)은 맛 배기에 불과하다. 초한지를 숙독해 보면 항우와 유방의 쟁패가 아니다. 기실은 한신과 항우의 대결이다. 유방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영웅의 쟁패를 관전하다가 어영부영 얌체처럼 어부지리를 얻었을 뿐이다. 시정잡배의 사타구니를 기어 지나 갈 정도로 절박했던 한신이 찾아간 곳은 항우의 진영이었다. 항우는 한신이라는 인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낭중(郎中)이라는 미관말직의 벼슬자리를 주고 박대했다. 한신은 충심을 가지고 여러 계책과 조언을 했지만 항우는 여전히 그를 개 무시하며 수모를 주었던 것이다. 그 수모를 견디고 버틸 때 동남쪽에서 의인이 나타났으니 그가 장량(자방)이었던 것이고 장자방의 따라 유방의 수하로 들어가며 초한쟁패의 시작이며 드디어는 해하(垓下)의 한 판 싸움으로 항우의 전신을 토막 내고 평생의 수모를 갚아 주었던 것이다.
부도가 나고 집구석은 풍비박산이 되어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그래도 살아야 했다. 1994년 중국으로 진출하기 전, 어떻게든 내가 살아가기 위해 가졌던 직업이 공사장인부, 세차장직원, 자가용운전사, 을지로 타일가게 배달원, 某가구회사 영업직원, 오퍼상브로커…그 기억을 자꾸 지우려 해서 그렇지 아마 서너 가지 더 있을 것이다. 쓸 데 없는 자존심 한가락이라도 내 마음 속에 있었더라면, 아마 죽고 말았을 그런 시련기였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버텨냈다. 가족을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세차를 종일하고 나면 밥숟가락 들 힘도 없었다. 손이 마구 떨리며 국물 같은 것은 떠먹을 수가 없다. 그 무거운 타일을 하루 종일 배달하고나면 파김치가 된다. 나도 그 꼴 난 사장 질을 해 보았지만 목에 힘주며 뒷좌석에 앉아 시쳇말로 운전기사를 개 무시하며 밤마다 요정을 찾아가 새벽까지 보초(자가용운전기사들이 대기하는 모습)를 세우는 것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늘 마음의 예비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고난과 수모도 참아야 한다고 다짐하며…(산골일기: 망국병에서 발췌)
“같은 군인인데…아들 시중, 가장 견디기 어려워”前공관병
“박찬주 사령관 뻔뻔한 해명 도저히 못참아” •
軍 “갑질 박찬주 사령관, 직권남용-가혹행위 혐의 적용”
- 공관병 “군기 잡겠다 보낸 전방 GOP가 공관보다 편했다”
- 호출벨착용·골프공 줍기·텃밭농사…‘갑질’로 드러난 실체
이상은 며칠 전 동아일보에 난 기사들이다. 나는 이 기사를 보며 박찬주 장군부부의 甲질 논란 보다 마치 저희들이 정의의 사도인양 아니면 양심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날뛰는 꼬락서니에 분통이 터진다. 개개인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장군의 아들 시중드는 게 인간적 수모든가? 골프공 줍고 장군님의 텃밭 맨 게 그리도 억울하고 수모일까? 솔직히 저런 놈들은 학창시절 일진 패거리에 그 보다 더한 수모를 당하며 버텨 왔을…부추전인지 김치전인지 아니면 성주 참외인지 제천딸기인지..그것으로 한 대 조 터진 게 그리도 억울하던가? 장군의 아들은 나와는 신분이 다르다고 한 수 접을 수 없었을까? 얼마나 잘나고 많아 배웠는지 모르지만 그런 걸 수모라고 생각하고 그 정도도 참을 수 없었단 말인가?
내가 더욱 분통이 터지는 것은 저런 젊은 놈들에게서 이 나라 대한미국의 장래가 엿 보이고 걱정스러워 울화가 치미는 것이다. 그 정도도 못 견디는 놈들이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고 생각하니 나라 꼬라지 불 보듯 뻔한 것 아니겠는가? 저런 놈들이 인생을 살아가며 조금의 난관에 부닥치면 자살을 하거나 무슨 조현 병이니 어쩌니 하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나는 그것을 탄(嘆)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