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자장면 이야기.

우연일까? 연일 군대에 관한 썰을 풀고 있는데 조선일보 블로그에서 예전에 올렸던 군대에 관련된 썰 위치를 가르쳐 준다. 열고 보니 아래의 글이다. 이래저래 군대에 관한 썰인데 중요한 것은 회원이신‘구름길님’의 글을 퍼 옮긴 것이다.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이라 두 말 않고 다시 퍼 왔다.

 

 

 

제목: 구름길님의 자장면 이야기.

BY ss8000 ON 4. 26, 2009

 

“새하곡(塞下曲)”이라는 중편소설이 있다. 이게 아마 이문열 선생을 문단에 입적(入籍)아닌 등단시키는 계기가 된, 소위 신춘문예인가 뭔가 하는 그런 소설인 듯 싶다. 한30년 전 신동아(新東亞)가 창간되고 얼마 뒤 부록에 엮인 것을 읽은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제대를 한지5-6년 되었으나 당시의 군대가 워낙 강군(强軍)으로 육성된 탓에 그때까지도 군기(軍紀)가 아직 남아있는 상태였는데, 마침“새하곡(塞下曲)”을 읽으며 그 생생한 표현에 아직도 군대 안에 머무는 듯 한 착각을 시종 일으키며 단숨에 읽어나갔던 그런 소설이다.

 

물론 그 소설 덕분에 이문열선생의 주가가 세상에 이목을 들어내는 계기가 되었지만, 나 역시 그 소설로 이문열 선생의 왕팬(뭐 그렇다고 그 양반의 집 앞에서 꽥꽥거리는 게 아니고 그 양반이 출간하는 저서는 무조건 샀다.)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기무부대 전신인 보안사령부예하의 어느 병사가 겪는 격변기의 군대생활 얘기인 이 출세작은 당시의 시대상을 적나라(赤裸裸)이 그려낸 수작이었다. 난 그 소설의 한 대목을 아직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일본 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나지만 이 대목이 왜 그렇게 명확하게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군따이와 요오료 데쓰(군대는 요령이다.)”라는…..

 

70년에 입대를 했었다. 그이 전 선배님들에게 외람되고 죄스런 표현이겠지만, 군이 많이 개선 되었다고는 하지만, 전후방을 통틀어 의문사가 부지기수로 있었던 시절이다. 어떤 일로 산꼭대기OP로 전출 가던 어느 날 산중턱의 보병막사에 앰뷸런스가 여러 대 서 있고, 침울한 분위기의 병사에게 들은 얘기는 전차지뢰를 베치카 속에 집어넣고 몰사를 기도했던 한 병사 때문에2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소리를 듣고 그 후 그곳을 지날 때면 괜히 뭔가 잡아 다니는 것 같아 M1소총을 거꾸로 잡고 뛰어서 오르내리든 기억이 아직도 있다. 그런 대형사건은 조중동에도 전우신문에도 기사화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또 있다. 정말 배고픈 시절이었다. 장정(壯丁)을 거쳐 훈련연대로 입소를 하면 강행되는 훈련 속에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던 그런 시절 말이다. 실제 배고픈 나머지 짬밥통을 휘저어 건더기를 건져 먹다 기간 병에게 치도곤을 맞는 훈련병을 가끔씩 보았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랬겠는가. 입대하던 날 꼬깃꼬깃 길게 접어 사리마다 고무줄과 함께 지전 몇 장을 끼워주던 어머니의 정성이 빛나는 그런 시절, 그 지전을 화장실에서 놀래꺼내 PX로 달려가 지금 같으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을 조악(?)한 빵부스러기 또는 과자류를 사서 품안에 감추고 다시 화장실로 달려가서 꾸역꾸역 배를 채우던 그런 시절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먹는 거 앞에서는 전우가 아니라 적 이상으로 살벌(?)했던 그런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그렇게 전우를 내동댕이치고 혼자 먹고 살겠다고 화장실을 찾았던…정말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던 시절을 억지로,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혼신을 다하여 기억 저 밖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했었고 따라서 아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제는 좋아 하는 이웃 한 분의‘블로그’에 오랜만에 들렸다가 그분의‘실토기(實吐記)아니면 참회기(懺悔記)를 읽으며 나는 그만 한30년 전의“새하곡”과 아주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차마 기억하기조차 부끄러운 지난날의 일들을 떠올리며 그 분의 실토기(?)아래 댓글을 실토하고 말았다. 그 이웃 분은 언제나 잔잔한 얘기들을 실토하듯 올리시는 분이다. 실제 某골프전문잡지에 수필을 올리시는 수필가이시기도 하다. 그분의 방에 가면 많은 읽을거리가 있음을 광고하고 싶어 이 아침에 중언부언해 보았고, 또한 그분의 글을 스크랩도 했지만, 직접 다시 따와 올려본다. 각설하고….

 

진짜 제목: 자장면과 양고기

글쓴이: 내 마음의 동심원(구름길)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별 일 없으면 구미에 한번 다녀갔으면 좋겠다고.

새 학기를 맞은 지 달포가 다 되어가니 동학년 선생님들께

인사라도 한번하면 어떠냐는 것이다.

 

해 마다하는 연례행사이다.

선생님들이 아내에게 아저씨는 어떤 사람이냐고 더러 묻는단다.

어떤 위인이기에 아내와 아들을 먼 곳에 두고

부산에서 혼자 유유자적 하냐는 궁금증일까.

자격지심에서인지 그런 생각이 먼저 들곤 한다.

그래도 깨끗한 정장차림으로 이발목욕까지 한 후

그 선생님들께 선을 보이러 구미로 올라갈 것이다.

제 아내를 잘 부탁한다는 인사와 함께 간식이라도 대접해야지.

대구에서 다니는 분들이 많아 저녁식사는 마다 하신다고했다.

올해 아내가 맡은 학년은1학년이다.

 

2002년 생, 갓 몽우리 진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

좀 일찍 결혼한 친구들에게는 그런 손자들도 있을 듯 싶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흠……..세월을 좀 되 감기해볼까.

내1학년 시절은 참 암울하게도 시작되었다.

그해5월에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정치사회적으로도 격변기였지만 우리 집안도 그러했다.

망부께서 전재산을 사기를 당하신 것이다.

집과 논밭, 자그마한 산까지.

 

민주정부가 군인들에게 정권을 찬탈 당하듯.

그 시절 시골의 그 재산이 돈으로 얼마나 되겠는가.

사기꾼에게 고스라니 다 날리고 방 한 칸도 없는 난감한 처지.

할머니 친구 분 댁 아래채에 이사를 한 며칠 후 입학식을 했다.

그래도 외손자라고 외할머니께서 등에 매는 란도셀 가방을 사주셨다.

반에서 한두 명 그런 가방을 가졌던 시절이다.

 

얼핏 보면 부잣집 아들같은 차림이지만 쌀이 없어서

성당에서 나눠준 구제품 밀가루로 끓인 수제비를 먹고 학교엘 갔다.

그 학교엘 채 한 달도 못 다니고 마산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께서 마산시청에 임시직으로 취직을 하신 것이다.

 

시청근처 셋방에서 위로 누나 둘과 나 그리고 넷째인 여동생을 임신해서

만삭이신 어머니…….그렇게 다섯 식구가 살았다.

월영국민학교를 다녔는데 하루는 학교를 가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날이 바로5월16일 이었다.

나라에 변고가 있으니1학년 여덟 살 짜리도 하루 휴교를 했다.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방직공장에서 철거덕철거덕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그 무렵 내가 처음 먹어본 자장면의 맛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시장 통 입구에 두 번째 집인가 화교가 하는 중국집이 있었다.

내 또래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애는 화교학교에 다녔다.

 

그 애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말도 곧잘 했는데

자기 엄마와 하는 쏼라쏼라 중국말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같이 놀다가 점심때가 되니 내게도 자장면 한 그릇을 주는게 아닌가.

그 고소한 향기는 회가 동한다는 말 그대로였다.

 

촌놈인 나는 눈치만 보다가 젓가락으로 휘휘 섞어서 먹는 걸 따라했다.

아 그 맛이란……….그 후 일요일만 되면 그 집앞을 얼쩡거리던 나.

나는 지금도 그걸 못 잊어 가끔 점심을 자장면으로 때운다.

 

5․16군사혁명은 우리 집이 또 한 번 이사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사정부는 임시직 시청직원에 대한 정리해고를 단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진주로 다시 이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산을 떠나며 자장면과 그 중국소녀와 헤어지는 게 너무 슬퍼서울었다.

내가 진주로 간다고 말을 하니 중국집 사람들도 미국으로 갈 거라고 했다.

그 아이는 지금 미국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내가 너무 걸신들린 듯 먹으니 자기 몫을 좀 덜어주며 생긋 웃던 그 모습.

세월이 거의 반세기나 흘렀으니 이젠 만나도 서로 알아보질 못 할 것이다.

본성동의 진주 큰집에서1학년을 마치고 내가1학년 입학을 했던

시골의 초등학교로 2학년 초에 다시 돌아왔다.

 

동네 사립 고등학교에 아버지께서 다시 교편을 잡게 되셨던 것이다.

작은 트럭에 조촐한 세간을 싣고 이리저리 옮겨 다닌 내 유년의 한때.

다시 세월을 조금만 원위치 시키자.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것이 두 가지 있다고했다.

진심으로 해 주는 칭찬 한마디.

그리고 음식으로 인해 마음 상한 것과 고마운 것.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경우에는 그 두 가지가 지금도 어제일 같다.

 

그 자장면이 고마운 것이라면 그로부터 14년 후 훈련소에서의 양고기

한 덩이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서운했던 기억의 먹을거리이다.

 

1975년 논산훈련소 제29연대.

한여름의 훈련소에 무슨 날인지 모르지만 양고기 국이 나왔다.

내 기억으로 단 한 번 맛 본 훈련소에서의 양고기였다.

줄을 잘 서야 된다는 게 군대에서 나온 말이라지만 진짜 그랬다.

그런데 난 그 날 줄을 잘못선 것이다.

 

내 국그릇엔 양고기가 채 한 숟가락도 안 되는 초라한 양이었다.

그런데 나와 친했던S의 국그릇엔 제법 주먹 반만 한 것이 들었던 것이다.

부러워서 흘끔거리는 날 못 본 척 그걸 볼이 미어지게 먹던S.

반이라도 아니 그 반의반이라도……….하며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PX에서 내가S에게 브라보콘을 사줬던 게 몇 개였던가.

 

숟가락 잃어버리고 울먹일 때 내가 조달해 준 은공은 또 어쩌고.

면도칼 빌려준 것과 담배 나눠 준 것도 기하이냐 말이다.

생긴 건 말쑥하게 계집애같이 잘 생긴S가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훈련소에서 헤어지며 보병병과였던 S와 또 만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대구국군군의학교에서 후반기 위생병교육을 받고 동해안 최북단 부대에

 

배치되어 간 것이 그해10월.

 

그 당시만 해도 전방엔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다.

그 부대에서 한해 정도 지나 갓 상병진급을 할 무렵S를다시 만난것이다.

보병부대의 상황병과 그 부대 의무대에 파견근무를 간 위생병으로.

양고기 건을 내색하지 않았지만 반가워 죽겠다는S를 끌어안았는데

S의 어깨너머 저 멀리DMZ 철책선 안에 산양이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어이 저거 산양아니가?”

“어디?아, 맞아. 폭풍지뢰를 밟아 다리가 셋 뿐인 넘도 한 마리 있는데….”

“야, 훈련소 양고기생각나나?”

“어? 양고기……그럼 생각나지.”

 

그러면서S는 어색하게 웃었다.

알고는 있었구나……..너도……..그럼 됐어.

나 그때 정말 야속하고 서운했거든.

그렇지만 내가 너라도 똑같이 했을지 몰라……..배고픈 청춘들이었으니까.

 

수백계단의 고진동계곡 수려한 단풍을 배경으로 잘 생긴 얼굴에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던S는 그날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두 번째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니S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M16소총 총구를 턱 아래에 받치고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이다.

소문으로는 상습적으로 상관에게 계간을 당한 모멸을 못 견딘 것이라고.

잘난 얼굴이 때로는 단명의 단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군형법에서는 군인의 계간행위를 처벌하고 있다.

(군형법 제92조(추행)계간 기타 추행을 한 자는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어두운 그 시절에는 쉬쉬하며 유야무야 덮고 넘어갔으리라.

 

연고 있으면 좀 달라고 해서 야전구급낭에 있던걸 모두 주었었는데

연고의 용도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진 얼굴이라더니 그런 아픔이 있었구나.

훈련소 양고기 건을 마음에서 다 지우지도 못 했는데 그렇게 죽다니……….

자장면과 양고기 이야기를 중앙동의 내 친구에 이야기해줬더니

자기도 그저께 먹을거리 때문에 실수를 했노라고 했다.

양고기의S처럼 나누지 못한 후회 같은 것.

 

주차장에 있으면 손님들이 가끔씩 먹을거리를 준다고한다.

그날은 커다란 스티로폼박스에 얼음을 채운 삼치 두 마리를 얻었단다.

오후에 관광버스기사가 주고 간 것인데 그게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다.

“야간에만 세우는 OO제강버스가 있는데……..그 기사가 여러 가지로

마음씀씀이가 고마운데도 삼치 한 마릴 안 준거야……욕심 많은 내가.”

“음……그걸 본 모양이군, 그 사람이. 근데 너답지 않네?”

“그렇제? 지금은 후회 된다…….정말.”

전철까지 들고 가는데 벌써 기진맥진.

근1m급 삼치 두 마리니 무게만 해도 묵직한 데다 얼음까지 채워졌으니

그런 중노동이 없었노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유난히 생선을 좋아하다보니 구이를 해먹을까 찌개를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 다른 사람 배려는 전혀 하질 못했다고.

“아직도 냉장고에 한 마리가 남아 있는데 저걸 어쩌지?”

“자르고 손질도 하고 얼렸어?”

“음. 그럼.”

“지금도 안 늦지. 내일 반만 갖다가 그 사람 줘라.”

“그럴까? 지금 줘도 될까?”

“안될 리가 있나. 먹을 거 가지고 삐지면 오래가니……빨리 풀어.”

 

주차장 펜스 따라 심어진 느티나무들이 꽃가루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 펜스를따라 군데군데 동백과 장미가 심어져있다.

“어이, 저거 웬 장미냐?”

“꽃피면 폼나겠지? 구청에서 화단을 새로 단장했어 .흙도 다르잖아.”

수선화 등은 다 뽑히고 이름모를 여러 종류의 꽃들이 자태를 뽐낸다.

봄이 오는 부두 길에 여전히 오가는 차량은 많은데 부두에

층층이 쌓였던 컨테이너는 눈에 띄게 줄었다.

경기가 그만큼 안 좋다는 증거이다.

 

불황이 오래 간다지만 그래도 계절이 오가듯 호시절이 또 올 것이다.

연일 외인들의 매수세로 후끈 달아오르는 주식시장이 그전주곡일까.

그랬으면 좋으련만…….베어마켓랠리치곤 상당한 상승폭이다.

 

슬슬 클럽도 좀 닦을 계절이다. 골프장 페어웨이엔 잔디가 좀 올랐을까.

올해는 딸아이에게 돈을 더 보내야하니 골프는 많이 줄여야한다.

골프도 골프지만 지금부터라도 먹을건 가능하면 나누며 살 일이다.

욕심부리면 그만큼 서운한 사람도 있는 법이니……….

 

나 역시 그런 잘못을 더러 저질렀을 것이다, 기억을 못할 뿐이지.

늘 듣는 힘 빼라는 말은 그 욕심을 줄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구미에 올라가면 오랜만에 금오산 산행이나 한 번해야겠다.

 

아지랑이 아른거리듯 중국소녀의 추억도 낙동강구비처럼 가물거리리라.

S의 어깨너머 산등성이를 오르던 산양마냥 깔딱고개를 거쳐

금오산 정상 현월봉(懸月峰)에 올라 내 마음도 거기 걸어두고 와야겠다.

내 마음의 동심원이 미국까지……저승까지 퍼지라고.

자장면 고마웠다고 지금은 마음 편하냐고 묻는 내 안부인사와 함께.

 

2 Comments

  1. 백발의천사

    2017년 8월 16일 at 1:50 오후

    오선생님과 부산의 그 분의 글을 읽으니 새삼 저의 그 어려웠던 시절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떠 오릅니다.
    저는 자장면(짜장면이 맞는 표현이라고 어느 분이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만)을 처음 얻어(!) 먹은게
    중3 졸업시즌이었습니다. 친구들 따라 들어 간 중국집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그 자장면은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습니다. 누가 밥값을 내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충격에 가까웠던 그 자장면 맛은 아직도 저의 혀끝에 생생합니다. 그 날 이후 그 자장면 보다 더 맛있는 음식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 자장면을 입에 넣었을 때 눈이 튀어 나오는 줄 알았다” 는 말로 그 때의 감동을 표현하곤 합니다. ㅎㅎㅎ
    그러나 저에겐 자장면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는 없어 많이 아쉽네요.

    특히 남자들 세계에서는 군대 이야기 나오면 서로 말을 먼저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공통의 증세가 있지요. 남들보다 늦게 입대한 덕으로 고등학교 후배나 동기들이 같은 중대 말년 고참으로 몇 명 있었죠. 막 1병 계급장 달았을 때 중대 1종계을 맡아보고 있던 동기가 어느 날 1종 창고로 불러 작은 삶은 통닭 한마리를 먹으라고 주더군요.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해 치웠죠. 그날 점심 메뉴가 닭고기국이었는데 아마 저 한사람 때문에 여러 병사의 국엔 닭고기가 있는 둥 없는 둥 했을 겁니다.
    그 친구 지금도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정 나누고 있습니다. 물론 희한하게도 전 그 기억이 생생하고 지금도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는데 그 친구는 전혀 그런 기억이 없다고 합니다. 그 친구 제대하기 전까지 저 나름 빚 갚는다고 애 썼던 것도 그 친구 기억에는 없나 봅니다 아쉽게도……….
    어쨌든 덕분에 정말 모처럼 젊었을 적 추억에 잠시 잠겼습니다.

    • ss8000

      2017년 8월 18일 at 6:19 오전

      선생님!
      그 시절 넉넉했던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됐겠습니까?
      지나고 보니 다 굶주리고 헐벗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이 너무 풍족해서 逆반대급부(?)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주 가난한 것 같지는(보리밥 일지언정 삼시 세끼를 먹었으니..)않았지만,
      6학년 수학여행(경주)을 돈이 없어 가지를 못하고 대신 산에 나무하러 갔었습니다.
      죄 없는 엄마에게 심통을 사흘 부렸지만….

      서울지방법원 말단 주사였던 아버지가
      625피;난을 가서 아직 환도를 못하고 경북 상주군청에 임시직으로
      계실 때 였습니다. 화폐개혁전 임시직의 월급이 9천환(아버지 어머니 두 분이 얘기 하는 걸
      들었음)9천환의 효용가치가 얼마인지 몰랐지만 수학여행에 보탬이 안 되는 건 느꼈습니다.

      아이고! 이거 옛추억 끄집어 낸다는기… 신세 한탄이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나라가 망하려니 요즘 젊은 놈들 하는 꼬라지가
      하도 답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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