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왔어요!”, 마누라가 비닐하우스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내게 한참을 달려와(비닐하우스와 집은 거리가 좀 있다) 전화기를 건네준다. “누구야?”, “XX 서방님.”전화기를 받아들고 검색해 보니 6촌 동생의 전화다. 최근 자주 통화하는 대상이다. 아주 급한 일은 아니지만 거금(?)을 들여 집안 중대사를 재종(再從) 동생인 그와 3:1 비율로 추진하고 있다.
서울 집에 가면 가끔 목도(目睹)하는 경우가 있다. 아들과 며느리는 전화가 오면 냉큼 저희들의 공간으로 뛰쳐나가 소곤소곤 전화를 받는 광경 말이다. 그것이 아비나 시아비 면전에서 큰(?)소리로 전화 받기가 조심스러워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나를 의식하는 게 아니라 저희들끼리 서로 의식하고 삼가는 행동이다. 그런 모습이 역해서 하루는“부부 간에 뭐를 그리 숨겨야 할 비밀이 있다고…”,“아녜요! 아버지! 아버님!”실로 이구동성으로 반박(反駁)을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행동들은 내 아들 며느리 뿐 아니라 열이면 아홉 어쩌면 그 이상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누군가와 아주 긴한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면 무거운 전화기를 휴대하지 않는다. 그냥 집에 두고 다닌다. 논밭에 나갈 때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것 같으면 어쩌다 휴대하지만 내 전화기는 거실 소파 팔걸이에 항상 놓여 있다. 휴대폰이 없을 때를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리 급한 전화라도 사고소식 부고(訃告) 아니면 경사(慶事)일 것이다. 조금 천천히 안다고 달라질 것 없다. 특이한 것은 내 성격이 불같이 급하지만 이 점은 내가 생각해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그리고 또 하나 마누라가 이곳에 오면 마누라 전화기도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다. 서로 그렇게 하자고, 해야 한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오래 전부터 자연스럽게 지켜온 둘 만의 행동이다.
생각을 더듬어 보면 나이를 점점 먹어가며 둘 사이는 지켜야할 비밀 같은 게 없어졌다. 특히 암 수술(55세 때) 이후 내가 먼저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쩌면 나만의 생존법인지도 모른다. 그 때까지도 우리 부부 사이엔 비밀 같은 게 존재 하지 않았지만 커트라인 그 아래 소소한 것까지 내려놓았다.
단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40대부터 모든 경제권을 마누라가 쥐고 있다. 나는 지금 마누라가 쥐고 있는 우리 집의 경제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고…. 마누라가 발행해 준 카드 하나가 유일한 용돈이다. 그것으로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하면 된다. 왜? 많이 썼냐? 어째서 이런 걸 샀느냐?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게 우리 둘만이 지켜온 원칙이고 관행(慣行)이다. 다만 꼭 현금이 필요하면 별 말없이 건네주니 아쉬울 것도 욕심도 낼 필요가 없다. 그런 즉, 비밀 같은 걸 만들어 화를 자초할 필요가 없다. 결국 내가 먼저 내려놓자 마누라도 따라온 것이다.
전화벨이 울리고 누군가 받을 사정이 여의치(화장실 또는 설거지 청소기 등등)않을 경우 누구라 할 것 없이 먼저 전화를 받고 잠시 대기시키거나 맨 위에 마누라가 비닐하우스까지 전화기를 가져와 전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전화든 어떤 상대든 비밀 같은 게 없다.
초등학교 시절 여자 동창생이 아직도 보험설계사를 하고 있다. 그 친구가 이런저런 보험관계로 전화가 온다. 그 친구 전화를 마누라가 싫어하는 빛이 역력하다. 그리고 가끔 보험 딴 데 할 수 없냐며 강짜를 부린다. “아이고! 참, 70 파파 할망구를 질투해!?”라고 놀리면“하이고! 질투는 무슨…”,“에에이~ 질투 하는 데 뭘..”오죽하면 그 나이에 아직도 그걸 하겠느냐며 설득하면 금방 수긍하는 것 외엔 전화기는 두 대지만 하나처럼 우리 부부는 공유하고 있다.
삼강오륜 중의 부부유별(夫婦有別)은 부부는 가장 가까운 사이이나, 남편은 남편의 본분이 있고 아내는 아내의 본분이 있는 것이므로 인간적ㆍ윤리적으로 별도로 나누어 지켜야 한다고 되어 있지만, 현대를 사는 모든 부부는 나이가 들수록 부부유친(夫婦有親)해야 하지 않을까? 부부가 더욱 친(親) 하려면 부부 간의 비밀을 없애는 게 가장 바람직 할 것 같아 해 보는 소리다. 그래서 나는 지금 정말 지독히 행복해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