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수상님!
오늘은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희 부부는 3남매를 둔, 금년 들어 결혼43주년 차 접어든 노부부입니다. 7년만 더 넘기면 결혼기념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금혼식(金婚式)도 치룰 것입니다. ‘치룰’것이라는 확정적 예단을 하는 것은 요즘 저희 부부 사이가, 가끔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하지만 전반적으로 젊은 날보다 더 돈독하기 때문입니다.(저 자신 조그만 일에도 흥분하고 제왕(帝王)으로 군림하며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이제 그런 버릇이 없어지고, 아내 역시 이전 보다 더 살갑게 서로를 존중하며 살기 때문에 내린 결론입니다)
저희 부부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닙니다. 정말 부부싸움을 많이 했고 그 후유증이 심각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 주로 교육문제(특히 가정교육, 강한 아이들로 키우고 싶었지만 아내는 그 반대)와 금전적 문제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자그만 사업체를 경영하다가 도산(倒産)을 하며 거의 파경의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이혼서류까지 준비하고 피차 날인까지 했으나‘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며 며칠 접수를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도 아니 어쩌면 천우신조(天佑神助)였는지도 모릅니다. 지인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진출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당연히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제일 큰 이유가 아내가 보기 싫었던 것입니다. 아내와 떨어져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말 다행이었던 것은, 저희 부부싸움의 이유가 불륜이나 외도(外道)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 달 두 달 그렇게 반년을 지나고 불현 듯 아내가 그립고 보고 싶었습니다. 아내와 떨어진 지 반년 만에 아내를 중국으로 처음 초청했습니다. 물론 그곳의 생활은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차츰 안정이 되었고 아이들을 중국으로 불러들여 그곳에서 대학을 마치게 한 것은 덤입니다.
사실 그 과정에도 악재(惡材)없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중국으로 진출한 소상공인 및 영세업자 열 사람 중 78명은 사업은 뒤 전이고 거의 현지처와 불륜에 더 매진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로지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문구를 교훈삼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정진해 나갔습니다. 전들 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그 유혹을 아이들을 기숙사로 보내는 대신 저와 함께 생활을 하며 제가 직접 그 아이들의 숙식을 챙겨 주었습니다. 더 하여 저와 아내가 서해(황해)바다를 무시로 건너다님으로 자칫 빠지기 쉬운 유혹과 갈등을 극복해 냈고 오늘에 이르러 향후 7년 후면 금혼식을 바라보고 있으며 지금 이 시각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그리고 남은 여생(餘生) 또한 그렇게 마감할 자신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짧게 표현 한다면 위기의 순간을 냉각기(却機)를 가지고 극복 했으며 이런 것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상님!
저는 가끔 한일관계를 부부관계로 본답니다. 양국의 국정(國政)을 언감생심 한낱 여염집 필부필부(匹夫匹婦)의 가정과 비교한다는 게 어불성설이겠으나 이치와 도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혼인관습은 어떤지 모르지만,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이 땅의 혼인풍습은 거의 부모끼리 정한 상대에게 얼굴도 신체구조도 모른 채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그랬던 관습이 일본제국의 침탈이니 을사늑약이니 하던 36년간의 압제기에 일본을 통하여 서양문물과 문화가 쓰나미 밀려오듯 밀려오며 쇄국(鎖國)으로 일관했던 조선반도가 개방과 개화를 했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 결과였습니까.
만약 그 때 반 강제에 의한 개방이 없었다면…하고 가정(假定)을 한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어쩌면 없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지금도 이씨(氏) 봉건왕조가 지속 됐을 것이라는 추측은, 오늘날 이 땅의 반을 넘게 지배하고 있는 김가 왕조를 보면 전혀 틀린 가정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같은 첨단의 정보시대에 인민을 통제하고 쇄국(鎖國)으로 통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들이 누구입니까? 공동의 DNA를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난 자랑스러운 배달의 민족, 한겨레, 우리는 모두 같은 민족입니다.
수상님!
잠시 귀 좀 빌려 주십시오. 이 땅에 살며 이 땅의 국민 한사람으로 자존심 상하는 비밀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땅의 남북 개. 돼지들은 등 따시고 배부른 것만 지상(地上)의 과제이며 더 하여 금전(金錢)만이 만능(萬能)하다는 생각들이 팽배해 있을 뿐 자신들을 어떤 짐승이나 야수가 지배하고 조정해도 무관하다는 민족적DNA를 배태(胚胎)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지상목표가 북쪽의 개. 돼지들에게는 이밥(白米)과 고깃국을 먹는 게 소원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북쪽의 김가 왕조가 일본제국이 물러난 직후부터 오늘날 이 시각까지 호시탐탐(虎視耽耽) 그나마 좀 먹고 살만한 남쪽을 괴롭히는 이유는 하나도 둘도 셋도…남쪽의 이밥과 고깃국 그리고 금전을 탈취하고 영원한 김가 왕조를 만들어 과거로의 회귀(回歸)만이 천만년 김가 왕조를 만들자는 야무진 꿈을, 머릿속에 자갈만 굴러다니는 남쪽의 자생적 적구(赤狗)와 적돈(赤豚) 무뇌아(無腦兒) 들이 동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Ryan Chun
2018년 1월 18일 at 5:23 오전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이죠.Little rocket man의 북한은.
저도 젊은 시절 서해를 뻔질나게 넘나들었고 지금은 태평양을 오가기에,선생님의 글에 큰 공감과 catharsis를 느낍니다. 촌철살인의 명문을 앞으로도 계속 부탁드립니다.
ss8000
2018년 1월 18일 at 4:16 오후
아! 그러셨군요.
천 선생님께서 보따리(무역)장사를 하셨나요?
저는 이제 은퇴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마는
아직도 자식 놈의 모자라는 부분을 좀 돕는 편입니다.
소일도 하고 용돈도 챙기며 여유롭게 블로깅도 하고.. ㅎㅎㅎ…
늘 격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Ryan Chun
2018년 1월 18일 at 8:35 오후
중국과 수교 된 직후 곧 바로
현지에 제조공장 시설을 중국 청도로 이전했다가,
큰 수업료 지불후 베트남으로 이전했슴니다.
Ryan Chun
ss8000
2018년 1월 19일 at 4:09 오전
ㅎㅎㅎ…
그런 아픔이 (?) 계셨군요.
제가 93년에 코딱지만한 공장을 교남(膠南)에 가지고 갔다가
그 놈들 일 하는 꼬라지를 보고 비젼이 없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2년만에 엎어 버리고 보따리장사로 전업했습니다.ㅎㅎㅎ…
천 사장님께서 그곳에서 빨리 손을 떼셨다니
현명하시고 총명하신 게 분명합니다.
사드 보복이 가 해 질 때 개인적인 분노도 분노지만
중국에 천착하는 크고 작은 기업들을 보고
미련하다는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감각으로 사업들을 하는지…..
ㅎㅎㅎ…제가 별 걱정을 다 합니다.
천 사장님은 정말 멋지십니다.
천사장님 같으신 분을 이런 데서 만난 건
저로선 행운이고… ㅎ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