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怯)과 분노(忿怒 또는 憤怒).

겁(怯)의 사전적 의미는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것.

‘겁’이라는 글자를 한자(漢字)로 표현하면 몇 가지 재미있는(?) 의미의 글자가 형성 된다.

 

겁(怯): 겁낼 겁. 무서워하다. 비겁(卑怯)하다. 회피하다.

겁(劫): 위협할 겁. 빼앗다. 협박(脅迫)하다. 겁주다.

겁(刦): 겁탈할 겁. 으르다. 위협하다.

겁(㥘): 두려워할 겁. 등등

 

이 외에 몇 개 더 있지만 생략하고 하나 같이 검을현(玄) 변에‘칼 도(刀)나 힘력(力) 아니면 갈고리 궐’등 시커먼 바탕에 힘이나 칼이 합쳐지면 왠지 위협적인 의미가 짙다. 그런데 겁낼 겁(怯)자는 검을 현(玄)변에 심성(마음)변이 합쳐지면 글자 자체가 어두컴컴한 곳에 마음(가슴)이 두근두근 하면 비겁해 질 수 박에 없다. 그래서 겁을 먹다. 겁을 내다 하는 것이다.

 

분노(忿怒)의 사전적 의미는 분개하여 몹시 성을 냄 또는 그렇게 내는 성을 두고 이름이다. 그런데 분노라는 한자는 달리 분노(憤怒)라고도 쓴다. 한자 중 동자이음(同字異音)의 글자는 꽤 되지만, 이자동의(二字同意)는 드문 것으로 알고 있다. 즉, 얼마나 분개하고 화가 나면 글자 하나론 부족해 달리 쓰고 의미를 같이 하겠는가? (크게 믿지는 마시고….순전히 오병규 생각이다.) 또 쓸데없는 얘기가 길었다.

 

쓸데없는 썰이 길어진 것은 두 단어의 함의(含意)를 썰 하고자 함이다. 겁(怯)과 분노(忿怒)는 완전히 반대 개념이다. 겁(怯)을 먹게 되면 이미 심정적으로 위축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피동적(被動的)위치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분노(忿怒)는 폭발하면 용감해지고 능동적(能動的)으로 승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암(癌) 까이 꺼’라는 잡(雜)썰을 올린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암에 걸렸다고 치자, 겁 먹은 사람은‘하필이면 나 또는 내가 왜?’하는 식으로 겁부터 먹고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나처럼‘암 까이 꺼’하며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다. 긍정과 부정의 차이와 결과를 단순비교해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지면낭비고 시간 낭비다.

 

죽을병에 걸렸는데 누군가는 그 병에 분노(忿怒)하고 반드시 물리치고 일어나겠다는 사람과 죽을병이라며 아예 희망을 버리고 삶을 포기하면, 편작과 화타가 살아나고 허준 선생과 이제마 선생이 명약을 쓰고 집도를 해도 이미 죽은 목숨이다. 포기한 사람에게는 약발도 안 받고 주치의도 될 대로 되라고 성의를 안 보인다. 의사 선생님도 환자가 차도가 있어야 신명나고 의술에 대한 자신감이 붙는 거 아닐까?

 

가끔은 생활고 또는 병마(病魔)를 비관하고 자살 하거나 죄 없는 가족까지 지옥행 열차를 함께 타는 모지리들이 있다. 진부하게 죽을 생각으로 살 생각은 왜 하지 못할까? 하지만, 이들은 태생적으로 비겁(卑怯)하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삶이든 병마(病魔)든 살아 보겠다 아니면 살아나겠다는 의지(意志)가 없는 인간들에게는 아무리 도움을 주려고 해도 소용이 없고 이미 밝혔지만 백약무효(百藥無效)인 것이다.(원장 선생님 이거 보고 계십니까? 제가 틀린 얘기 했습니까?)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소위 왕따라는 현상에 대해‘왕따를 시키는 주체도 문제지만 당하는 객체가 더 문제’라고 주장해 왔다. 요즘 미투 현상이 바로 그런 맥락이다. 무엇엔가 누군가에 당하고 있다면 분노스럽지 않던가? 겁을 먹으면 분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 유서니 뭐니 하며 달랑 몇 자 적고 부모 마음에 대못을 박으며 노무현 같이 아무 장구나 장비도 없이 이런저런 장소에서 뛰어 내리고, 스승 아니라 스승 할아비가 성추행 또는 폭행을 하더라도 그 당시에 밝혔어야 했다. 오늘 같이 폭포수처럼 무제한으로 마구 폭로되는 현상은 진작 분노하고 그 분노가 용감무쌍함으로 승화 됐어야 했다.

 

오늘 신문에 전직 국회의원이 어떤 여성을 겁탈하려고 호텔까지 유인은 했으나 그 여성은 분노했기에 용감하게 그곳을 탈출하여 그 놈을 고소하고 쇠고랑을 채웠다는 기사다. 만약 겁을 먹고‘이러시면 안 돼요!?’라며 버텼다가 완력에 못 이겨 나중에‘안(못)’자는 빠지고 ‘돼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가해자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겁에 질려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이라도 ‘돼요!’를 외쳤다면 합의에 의한 거시기라고 강변(궤변)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다 겁을 먹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들이다.

 

이아침 이렇게 장황한 썰을 풀게 된 동기는“”그 사람이 폭격 안 한다고 했나요?”… 연평도의 김영철 트라우마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02/2018030201938.html“라는 기사 때문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연평도 주민들이다. 저렇게 겁이 많고 비겁할 수 있을까? 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이라고 하지만 것 보다는 심리적 위축이다. 마음속으로 위축(萎縮)이 됐다는 것은 겁(怯)을 먹었다는 얘기다. 겁을 먹으면 결국 비겁해 지는 것이다.

 

제대로 된 연평도 주민이라면 이번 김영철이 왔을 때 주민 중 일부 아니 단 한 사람이라도 플랜카드를 들고 나오거나 시위 장소에 동참을 했어야 했다. 연평도 포격의 실제 피하자는 연평도 주민일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이 그 같이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겪고도 남의 일처럼 치부하고 겁만 먹고 있으면 왕따 당하거나 성폭(추)행 당한 피해자와 무엇이 다른가?

 

설령 그놈들이 안 한다고 해서 안 했던가? 엽전들의 가장 나쁜 국민성은 어떤 이슈나 사안이 마음에 안 들면 생각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파르르 끓어 오는 비등점(沸騰點)은 세계 최고고, 반면 나와 무관하면 이웃이나 나라가 어찌되든 나 몰라라 하고 식는 정도가 아니라 빙점(氷點)으로 냉각되는 것 또한 지구촌 최고를 자랑한다.

 

나는 안 다치고 안 죽었거니, 나는 성폭(추)행을 안 당했거니, 나는 왕따를 안 당했으니 남의 일. 그 놈들이 성폭(추)행, 왕따, 포격 다신 안 한다고 약속 했으면 됐다고? 남의 일이니까? 정당한 일이나 사태, 사건. 사고에 분노(忿怒)할 줄 모르는 인간은 언제고 똑 같은 일이 반복된다.

 

연평도 주민들의 트라우마 그리고 남북평화회담? 문재인과 그 패거리들은 북쪽 김가 왕조 패당들에게 겁(怯)을 먹고 분노(忿怒)할 줄 모르는 무지렁이들이 벌이는 촌극일 뿐이다.

 

분노하자. 분노하라는 게 상대나 적을 가벼이 보라는 게 아니다. 경적필패(輕敵必敗)라고 하지 않든가. 분노하되 앞뒤전후 좌우양방을 봐가며 하자는 얘기다. 우리에겐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

 

 

2 Comments

  1. 김연호

    2018년 4월 4일 at 11:54 오전

    반가운 글을 만나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기억이나 하실려나
    저 청해입니다.
    세월이 지났네요

    마치 또 다른 나를 보는듯 (무례하게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술술 잘 풀어 놓으시니
    속이 좀 풀리려나..

    에고 ~그쪽 소식듣자면
    열불이 나고 혈압이 치솟네요.

    거의 끝물이라고나 할까?

    어쩌다 저지경이
    라는 말밖에 안나옵니다.
    개인들이야 이렇게 살다 가는거겠지요.

    • ss8000

      2018년 4월 5일 at 6:51 오전

      아니? 어떻게 아저씨(또는 총각) 명함을 들고… ㅎㅎㅎ…
      ‘윤손’이라는 원 아이디는 그래도 눈에 익습니다.

      제가 어찌 청해님을 잊으리오.
      애국을 위해 그 먼 아리조나(텍사스 이시던가?)에서
      노가 정권 물러나라는 시위 참가 차 오셨던….
      아니 것 보다 제 후임으로 막중한 방장의 수고로움을 맡아 주셨던,
      그리고 얼마 전까지도 청해님으로 나오셨는데….위블과 관계가 소원 해 지셨습니까?
      생소한 함자로 나오셨습니다.

      그나마 청해님은 이 땅에 아니 계시니
      저희만 하시겠습니까?

      저는 정말 이곳을 떠고 싶습니다.
      그리고 준비 중입니다.

      답답한 이 심정을 썰로 풀긴 합니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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