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紐由)와 밀우(密友)의 활약-
고구려 환도성 일대에서 고구려 군과 魏나라 군이 맞장을 붙었으나 성은 무너지고 동천왕은 겨우 성을 탈출하여 도망쳤다. 왕이 도망친 것을 알아 챈 위나라 장수 왕기(王基: 관구검의 부장으로 출전함. 훗날 관구검의 반란을 진압하는 공을 세움)가 그 뒤를 쫒아오고 있었다. 이 때 반열에서 밀우(密友)라는 장수가 나타나 결사대를 결성한다.
왕은 밀우가 위 군과 대적하고 있는 사이 안전한 곳까지 이동할 수 있었으나 밀우의 걱정이 앞섰다. 이때 유유(紐由)가 적진으로 뛰어들어 밀우를 구해 데려왔다. 밀우는 상처가 심하여 정신을 잃었으므로 동천왕이 직접 나서서 그의 무릎 위에서 쉬게 해주었다.
적의 추격은 계속 되었다. 이때 다시 유유가 위나라 군에게 백기를 들자 위나라 장수는 긴장을 풀고 그를 맞이하였다. 유유는 준비해간 음식을 대접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위나라 장수 가까이 다가가서 식기 속에 감춰 둔 칼을 꺼내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위나라 장수는 반격할 사이도 없이 죽어버렸고, 놀란 위나라군은 유유를 향해 공격하여 유유는 그 자리에서 죽지만, 고구려 군이 위나라 진영으로 짓쳐들어오니 대장을 잃은 위나라 부대는 우왕좌왕하며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버렸다. 위 군이 물러나고 전사한 유유에게는 구사자라는 벼슬을 추증하고 그의 아들 다우도 대사자로 삼았다. 그 해가 서기 245년 단기 2578년(중국 魏 제왕 정시 6년, 고구려 동천왕 19년, 신라 조분왕 16년, 백제 고이왕 12년)때의 일이다. (삼국유사에서 발췌)
관구검(毌丘儉)-
자는 중공(仲恭)이며, 하동 문희(지금의 산서성 聞喜)사람이다. 위(魏)나라 대신으로 유주자사, 양주도독, 진동장군 등을 역임 했다. 두 차례 고구려를 침공하여 한때 고구려를 위태롭게 했다. 서기 244년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 했으나 오히려 고구려 군에게 6천여 명의 군사를 잃는 등 고전을 하다가 비류수(沸流水)에서 고구려 군을 대파하고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켰지만 고구려 장군 유유(紐由)의 기습작전으로 회군했다. 훗날 사마사가 위주 조방(曺芳)을 폐위 시키고 조모(曺髦)를 군주로 세우자, 마음속으로 분개를 하여 양주자사 문흠(文欽)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사마사를 쳤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패한 뒤 가병 10여 명과 신현이라는 곳으로 달아났으나 신현(愼縣) 현령 송백이라는 자가 그를 대취하게 만든 뒤 죽였다. 삼국지 위서(魏書) 관구검전(毌丘儉傳)에 따르면 관구검이 신현으로 달아나 좌우가 모두 흩어지고 다만 동생 관구수(毌丘秀)와 손자 관구중(毌丘重) 등과 함께 물가의 풀 속에 숨어 있다가 신현 안풍진 도위 부하들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고 적혀 있다. 그 해가 서기255년 단기 2588년(고구려 중천왕 8년, 신라 첨해왕 9년, 백제 고이왕 22년)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내가 삼국지를 처음 접한 것은 김용환 화백의‘코주부 삼국지’를 학생 잡지인‘학원’에 연재한 것을 피난지 초등학교 도서실에서 보기 시작 하면서다. 뭐, 내가 따로‘학원’잡지를 정기 구독할 입장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당시 사정으로 학교 도서실 또한 신간을 비치한 것도 아니고 낡은 잡지를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되 비치되어 있었고 그것도 톱니 빠지듯 듬성듬성 몇 달을 건너기가 일수였다.
재미는 나는데 중간에 이빨이 빠지고, 결과는 궁금하여 어쩔 수 없이 마침 도서실 서가에 꽂혀 있는 두꺼운(?)삼국지 단행본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삼국지를 보기 전에 고전을 먼저 접했던 게 조부님의 사랑방에 굴러다니든‘장화홍련뎐’. ‘장희빈뎐’,‘심청뎐’하는 따위의 5일장에서 구입하신 책자(?)를 먼저 섭렵한 것은 한글을 바로 깨우치고 나서부터였다.
사람의 습관이란 게 어쩔 수 없었나보다. 그 후로 고전이라면 중국의 4대 기서를 포함하여 한국역사, 삼국유사, 설화 집,심지어‘고금소총’‘요철인생’도 마구마구 읽어댔다. 좀 더 세월이 흐르고 머리가 야물 때 쯤 월탄 박종화선생의‘삼국지’를 다시 접했을 때, 좀 과장해서 내 삶의 지침서라고나 할까? 아무튼 스무 번은 더 읽었을 거다. 이상한 건 그리 읽어도 새롭고 질리지 않는 것이다. 삼국지 읽듯 교과에 필요한 다른 책을 읽었다면, 아마도 지금쯤 이름자 앞에 이런저런‘박사’라는 호칭이 따르지 않았을까? 뭐, 그렇다고 내 자신 보따리장사라고 주눅 들어 본 적은 없다. 물론 지금도 가끔 너덜너덜한 삼국지를 펴 들곤 한다.
그랬던 삼국지를, 중국에 진출하면서 삼국지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을 방문하거나 옆을 지날 때, 또는 보따리 상담을 할 때, 중국인들에게‘여기는 과거에(삼국지에서)누가 활약했고 누가 태어난 곳이다.’라고 설명을 해주면‘니가 그걸 어떻게 아냐? 너 진짜 중국 통이다. 너 대단하다.’뭐, 이러면서 추겨 세우면 우쭐하기도 하고, 조금 애교석인 표현으로‘야~! 값 좀 깎아라!’이러기도 하며 생업수단에 큰 보탬은 아니더라도 스무스하게 상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한 즉, 먹고 살려면 자꾸 연구(?)를 할밖에…이러기를 장시간 거듭하다보니, 우리가 얘기하는 삼국지 즉,‘삼국지연의’는 정사라기보다 픽션이 더 가미된 부분이 많기에‘삼국지정사’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된다. 관계되는 책자를 대형서점에 들려 꽤 많이 샀다. 유사 이래 우리의 역사와 저들과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보며 비교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보니 좀 더 사실적 표현을 위해 어쭙잖지만 단기(檀紀)나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연대를 함께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보따리장사를 은퇴하면‘삼국지로 바라 본 우리의 정치사’를 불학무식하지만 심심파적으로 그려볼까 하는 목적도 있다. 그 전초 단계로 가끔씩‘삼국지’를 인용함을 혜량 바라오며(하략)
BY ss8000 ON 5. 11, 2005
덧붙임,
아가리들 닥쳐라!!
유유와 밀우의 활약상이 그려진 얘기는 내가 초등학교 3년 때이든가 4년 때 도덕교과서에 그려 진 내용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라 그 내용이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인지 또 무엇을 교육하기 위한 것인지 감도 못 잡고 그냥 재미있는 얘기로만 치부 했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월탄 선생님의 삼국지를 섭렵했을 때 다시‘관구검(毌丘儉)’이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초등학교 때 스쳐지나갔던 우리의 역사 한 장면에 나타났던 인물이 삼국지에 나타났으니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것과 관련된 책자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있을 법하여 그것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었고 과연 그 기엔 위(魏)나라 고구려. 신라, 백제의 역사가 많은 연관을 짓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우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흩어진 퍼즐 조각 맞추듯 연대를 짜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한반도 내 우리의 역사를 말 할 때 보통은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 수록된 내용을 주장한다.
삼국지는 서진(西晉) 사람인 진수(陳壽,233~297)가 280~289년 사이에 편찬한 중국 삼국시대에 관한 정사(正史)이다. 이 책은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이며, 각각은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상은 이활 선생의 삼국지에 대한 명쾌한 답변 참고)
이 가운데 위서 제30권이 ‘오환선비동이열전(烏丸鮮卑東夷列傳)’이므로 삼국지위서동이전이란 삼국지 권30 가운데 동이 부분을 말한다. 그리고 삼국지위서동이전을 줄여 ‘위지(魏志) 동이전’이라고도 하며 구성은 먼저 서문이 있고, 다음으로 부여(夫餘)·고구려(高句麗)·동옥저(東沃沮)·읍루(挹婁)·예(濊)·한(韓)·왜인(倭人)의 열전이 있다.
삼국지위서동이전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첫째, 오래된 자료라는 점이다. 사료는 오래된 것일수록 그 가치가 높다. 그런데 중국의 삼국지가 3세기경에 편찬된 반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료인 삼국사기(三國史記)는 12세기에 편찬되었다. 따라서 삼국지는 우리의 역사 삼국사기보다 900년 이상 앞선 사료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지식백과 인용)
삼국지연의 그 자체는 지나치게 과장 되고 허구 투성이다. 그러나 스토리의 전개는 허구이지만 얘기의 근간(根幹)은 역사(정사)에 뿌리를 박는 것이다. 내가 굳이 삼국지의 연대와 중국 그리고 한반도의 연대를 표기하는 것은 스토리는 재미로 읽되 최소한 그 스토리의 근간은 기억해 보자는 의미에서 좀 고된(?)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삼국지는 중국 역사의 한 페이지다. 그 페이지 속에 어쩌면 티끌 같은 동이(東夷) 땅의 역사를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티끌이 우리 역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고대사를 음미해 봄 직하지 아니한가?
그런데 그런 역사를 거부하고 왜곡하는 놈들이 빨갱이들 아니던가? 역사를 저희 마음대로 조작하려는 놈들이 어디고 할 것 없이 빨갱이들 아니던가?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반도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한 수단이고 북괴의 역사 왜곡은 언급할 수도 없을 만큼, 김 부자3대가 그 역사의 주체이고 이제 남한의 역사마저 종북 빨갱이들의 손에 좌지우지 마구 파손 왜곡 되 가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보수 정권이 집권 할 때는 신문이나 뉴스로 보도라도 되었지만, 빨갱이들이 집권만 하면 동북공정의‘디긋’도 금기어로 되어 있는 것 같다. 하기는 남의 정사에 근거한 얘기를 허구니 소설이니 하는 개자식들이 그 허구 속의 제 나라 역사가 대갈빡에 인식 되겠는가? 특히 대갈빡에 든 것 없이 염이나 해 처먹는 놈이 가장 발악적으로 남의 연구결과를 폄훼하고 있으니 제발 이 썰을 읽고 그 악취 나는 아가리를 닥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