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 자가 현 정권의 어떤 직급이며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문재인의 공약(公約)을 공약(空約)화 하는데 가장 힘을 보탠 자가 아닐까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는 관저 이전 시점 및 방식에 대해서는 “관저가 갖고 있는 사용상의 불편한 점, 풍수상의 불길한 점을 생각할 때 옮겨야 한다”면서도 “현 대통령만 살다가는 집이 아니다. 제대로 된 위치에 어떻게 짓는 것이 좋겠냐는 것은 경호처가 건축가와 협의하고 용역을 줘서 안을 만들기로 잠정 결정했다”고 말했다.>>>>
전국시대 위(魏)나라 문후(文侯)때 서문표(西門豹)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위 문후의 명으로 어떤 지방의 방백으로 부임해 보니 성안의 거리가 한산하며 왕래하는 백성들이 많지 않았다. 어느 날 주민회를 열고 그 연고를 물었더니“하백(河伯:水神 즉 물귀신)이 부인을 취하는 바람에 우리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라며 하소연을 한다.
고을 가운데는 큰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를테면 하백은 그 강을 다스리는 수신(水神)이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여 매년마다 여인을 한 명 씩 골라 부인으로 받아들이는데 여인을 하백에게 보내주면 해마다 풍년이 들고, 여인을 보내지 않으면 하백이 노하여 큰 파도가 일어나 인가를 덮치거나 농사를 망친다는 것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쓰나미가 덮친 격이다.
서문표가 뒷조사를 해본즉 이런 행사를 처음 시도한 것은 고을의 호족과 무당 그리고 아전들이었다. 그들은 매년 백성들에게 수십만 전의 세금을 걷어 하백의 부인을 찾는 비용으로 쓰고 나머지는 자기들끼리 나누어 갖는 것을 알았다. 뿐만 아니라 하백의 부인으로 점지된 처녀의 부모는 딸을 살리기 위해 빚을 내서라도 뇌물을 바쳤고 그렇지 못한 부모들은 야반도주를 하거나 딸이 강물에 던져지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그해의 행사 날 서문표도 직접 참관하기로 했다. 엄중한 행사에 서문표는 무당과 그 제자들 그리고 그동안 행사의 주관자들인 호족과 아전들을 도열시킨 뒤, 처녀를 하백에게 바치려는 순간 그날의 희생양이 된 처녀의 얼굴이 곱지 않다며 무당에게 명한다. ‘아름다운 처녀를 구해 다시 바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백에게 전하라며 강물로 들어가라고 한다. 결국 버티는 무당을 강제로 강물에 집어 던졌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무당의 제자와 호족 그리고 아전들을 모조리 강물 속으로 수장을 시켰지만 그 해는 대풍이 들었고 집집마다 태평가가 절로 흘러 나왔다. 그 소식을 듣고 도망쳤던 주민들이 다시 돌아와 큰 고을이 되었던 것이다.
유홍준 “대통령집무실 광화문이전 불가능”…대선공약 파기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04/2019010401918.html
문화와 문명이 제대로 서지 않은 고대에도 위국(爲國), 위민(爲民)을 위해 미신을 타파했던 것이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가? 같지도 않은 놈들끼리 작당을 하여 국민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약속하고 그 덕분에 대통령이라는 최고지도자가 된 사실을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라는 미신을 앞세워 국민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해 가며 공약(空約)화 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나 같이 고교 중퇴한 무식한 놈이 그랬다면 그나마 이해라도 하겠지만, 최고학부를 나오고 전직 변호사라는 법률가로 또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놈들이 미신에 의존하는 광신도(狂信徒)라니…??? 아연실색(啞然失色), 차마 벌어진 입이 닫혀 지지 않는다.
아무리 관저가 불편해도 집 없는 서민만큼 서럽고 불편하겠나? 언감생심 비교도 할 수 없는 얘기지만 태평연월(太平烟月)의 대명사 요와 순 임금의 궁궐은 모옥(茅屋)이었지만 백성들이 격양가를 부르면 함포고복(含哺鼓腹)하지 않았다던가.
풍수상의 불길한 점? 북쪽 똥 돼지 3대가 집권하는 그곳은 풍수상 길한 곳이라 3대를 세습으로 나라를 집어 삼키고 인민을 유린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청와대가 불길한 장소라고 하자. 제대로 된 대통령이라면 자신의 안위(安慰)는 뒤로 하고 선정(善政)으로 국정을 보살피며 그 불길함을 이겨 내는 것이 진정한 지도자가 아닐까?
나라의 최고 지도자라는 놈이 한갓 박수무당이나 다름없는 놈의 얘기에 정신을 팔고 국민과의 굳은 약속을 저 버리고 있으니 어찌 나라와 국민이 무사할 수 있겠는가? 언젠가 얘기 했지만, 나라가 망하려니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 시절에서 다시 고려 말 공민왕 시절의 혼란기로 치닫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더 이상은 이런 실정을 방치하거나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 진실로 나라가 걱정이 된다면 국민이 봉기할 때가 된 것 같다. 개. 돼지들이여!!! 인간으로 환생 하자!!!!
<<<<보너스>>>
위국(爲國), 위민(爲民)을 한 진정한 지도자 서문표(西門豹)의 뒷얘기.
서문표가 업도(鄴都)의 태수(太守)가 되어 다스리다가 일 년 만에 위문후(魏文侯)에게 시정을 보고하기 위해 안읍(安邑)에 들렸다. 위문후가 서문표를 보자 그가 정치를 잘못한 것을 꾸짖으며 태수의 직위에서 파면하려고 했다. 서문표가 사죄를 하며 일 년 동안의 말미만 주면 그 동안의 실정을 만회해 보겠다고 청했다.
위문후가 허락하자 서문표는 임지로 돌아와 그때부터 백성들에게서 중세를 부과하고 재물을 긁어모아 위문후의 주변에 있던 총신들과 측근들에게 뇌물로 바쳤다. 이어서 약속한 일 년이 되자 서문표가 다시 안읍에 들려 위문후를 배알했다. 위문후가 그 동안 어떻게 했기에 업도가 잘 다스려졌냐고 서문표에게 물었다.
서문표가 대답하기를 처음 부임해서는 백성들을 위해 세금을 적게 걷으며 선정을 베푸는 데만 진력하여 위문후의 측근들과 총신(寵臣)들에게 아무 것도 바치지 않았다. 그래서 위문후의 주변 사람들이 그 자신을 헐뜯게 되어 군주의 책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일 년 간 말미를 얻어 임지로 돌아간 다음에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가혹하게 걷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긁어모아 위문후의 측근들과 총신들에게 뇌물로 가져다 바치자 자기에 대한 평판이 높아지고, 자기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해져 군주의 칭찬을 받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위문후가 서문표의 말을 듣고 자기의 잘못을 사과하며 서문표에게 계속해서 업도를 맡아 선정을 베풀어 달라고 청했으나 서문표는 업도의 태수자리에서 물러나 다시는 위(魏)나라의 벼슬을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