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수영을 정식으로 배워 본 적이 없다. 수영이라는 게 신장과는 상관없지만(아! 선수는 좀 다르겠다.), 키가 작아 죽을 고비를 넘겼던 적은 있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건, 초등3년 여름방학 때였다. 마을 야산기슭에 그리 크지 않은 농업용 저수지가 있었는데 그곳으로 친구들과 자맥질(수영을 할 줄 모르니 이게 옳은 표현일 것 같다)을 하러 갔었다. 아마도 그 해 한발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왜냐하면 저수지의 수량이 많이 빠져 있었고 경사진 바닥이 보였기에 경사진 곳에서 자맥질을 하며 물놀이를 즐겼기 때문이다. 동급생이지만 개 중에 나보다 모가지 하는 더 큰 놈(조카뻘)이“ 야! 병규야! 너 나따라올 수 있어!?”라며 경쟁심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만 내가 놈 보다 모가지 하나 작다는 생각은 않고 불붙은 경쟁심만 가지고 놈이 하는 대로 따라가 들어갔는데 순식간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것이었다. 와락 겁이 나며 팔다리를 휘저으며 밖으로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안 쪽으로 빠져 들어갔고 정신을 잃고 말았던 모양이다. 얼마 시간이 경과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주위의 친구들이‘이제 정신이 드느냐’고 걱정들을 하고 있었고 내 곁에는 나 보다 여덟 살 더 많은 7촌 조카님이 빙그레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날(마침 그 조카님도 그날 그 곳으로 물놀이를 하러 왔다가…지금도 그 양반이 생존해 계신다.)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구해 준 것이다.
그 후 혹시라도 물에 빠지면 살아나는 방법을 배운다며 마을 웅덩이(역시 농수용으로 간간이 파 놓은 곳이 있다.)에서 물에 뜨는 법을 익혔다. 일단 물속에서 뻣뻣이 서서 발을 세차게 앞뒤로 흔들면 부력(浮力)이 생긴다. 다시 팔을 열심히 저으면 가라앉지는 않는다. 왈, 개헤엄인 것이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친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 게 얼마나 오만하고 건방진 생각인가? 오씨 가문이 아무리 양반이지만 그래도 살고 봐야 하는 거 아니던가. 그게 물에 빠졌을 때 나의 생존법이다.(나의 그런 즐겁지 않은 추억 때문에 3남매에게는 어릴 때부터 생존을 위한 수영을 가르쳤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아마도 70년대 말까지도‘뚝섬유원지’라고 있었다. 미루나무 숲이 우거진 백사장이 마냥 넓었던 시설도 없는 그런 유원지. 중학2년 때였다. 급우 중에 나 보다 모가지 하나는 더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어쩐 일인지 수영을 그렇게 잘했다. 아마도 그의 집이 뚝섬 근처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여름날 일요일이나 방학 때면 그 친구 집엘 가면(나는 당시 안국동에 살았고 안국동에서 타면 을지로를 거쳐 지금의 성수동까지 가는 전차가 있었다) 녀석은 늘 나를 데리고 그 유원지로 가서 수영팬티를 빌려(당시는 수영팬티를 10원이던가? 빌려주던 시절이었다)입고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한강 물 속에 놀곤 했었다.
어느 날인가 몹시 후덥지근한 장마철이었다. 당시는 익사사고가 다반사였을 때다. 특히 광나루나 그 위의 상류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한 시체가 뚝섬에서 발견되어 모래사장 위로 건져지는 경우도 가끔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날도 불어난 한강물에 무엇이 떠내려 오는 것을 친구 놈이 겁도 없이 황토 물속으로 뛰어들어 건져오는데 익사한지 오래 되었는지 차마 눈뜨고 못 볼 정도로 부패하고 불어난(내 평생 익사체를 그 때 처음 봤다)익사체를 건져 오는 것이었다.(난 그 후 그 놈의 손을 절대 잡지 않았다.)
그런 사건이 있고 일주일 뒤 다시 놈의 집에 놀러 갔다. 그날은 장마가 지나고 한강 수위도 좀 낮아진 때였는데 이번엔 놈이 내게 강을 건너 절에 가자는 것이었다. 그 절이 아마도‘봉은사’가 아닐까 생각이 들지만… 아무튼 놈은 저만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었다.
무슨 객기가 발동 했을까? 순전히 개헤엄밖에 할 수 없는 내가 놈의 제안에 선뜻 따라 나선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죽으려고 환장을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놈의 수영실력을 믿었고 또 비록 개헤엄이지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몇 십 메터 나갔을까?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숨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그 때 느끼고 알았다. 당황하지 말고 물에 드러누워 발을 상하로 움직여 주면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스스로 느껴야 하는 것이다. 아주 힘이 들 땐 놈의 등에 업히다시피 하며 결국 한강을 건넜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알 수 없고 돌아올 생각에 강 건너를 바라보니 이젠 죽어도 못 건널 것 같았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이제 못 건너겠다는 내 말에 놈은 잠시만 기다리자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성수교가 있었던 시절도 아니고, 뚝섬에서 봉은사 쪽으로 가는 시내버스가 있었는데 그 버스를 나룻배에 싣고 강안에 도착하면 버스를 운행하는 그런 시스템(?)이었다.(이런 사실은 최소한 70이 넘어야 알 수 있는 우리들의 옛 한양 생활이다^^) 즉, 놈의 제안은 나는 봉은사에서 뚝섬 쪽으로 향하는 나룻배를 부여잡고 건너오고 그 친구는 다시 물속으로 입수했던 것이다. 그렇게 평생 단 한 번 한강을 건너 온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무모한 짓을 겁도 없이 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저려오는 경험이었다. 이번 다뉴브강 사태를 돌아보면 수영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삽살개헤엄이라도 배워 두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 같다. 문재인의 은퇴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문재인이 재능 기부하는 셈치고 강사가 된다면…..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02/2019060201732.html
데레사
2019년 6월 4일 at 8:27 오전
외국의 우리 손자들은 어느 나라에 살던 미국학교를 다니는데 1주일에
한번씩 생존수영을 배우더라구요. 옷입고 신발신고 가방맨채로 수영하는것이라
그날은 집에오면 빨래거리가 태산이더라구요. 아이들이 셋이니까요.
우리나라 수영장에서는 예쁘게 수영하는 폼만 가르치는데 미국교육은
다르더군요.
다뉴브강, 저도 저곳에서 배를 탔습니다. 낮에요.
이번 사고나고 그때 사진을 꺼내보니 구명조끼 안입었어요.
제 성격에 입으라고 주었으면 안입었을리는 절대로 없을텐데 안 주었던것 같아요.
속도가 중요하다고 많은 인력을 보냈지만 결국 산 사람 구조는 못했고,
어제 아침 신문에 장기표씨가 박근혜에게는 최순실이 한 사람, 문제인에게는
최순실이 열사람…쓴 글이 생각 납니다.
ss8000
2019년 6월 4일 at 12:03 오후
세월호 사태 이후 각급 학교가 생존 수영을
가르친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때뿐이고 유명무실해 졌다고 합니다.
이번 사고가 난 여행사는 우수 여행사로 문재인의 표창까지 받았답니다.
유람선 여행은 형식적이라도 구명조끼가 비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준비 되어 있지 않다면 여행사에서라도
요구를 했어야 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격이지만
헝가리 당국도 이번 사태로 학습효과를 받았을 겁니다.
문제는 이런 갑작스런 사고를 정치로 악용하려는
문재인이 문제지요. 어떻게 속도라는 아가리를 놀리며
구조대(?)를 파견 합니까.
그것도 세월호 구조대(?)를…..
그나마 국민들이 두 번은 안 속은 거죠.
문가만 뻘쭘해 진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