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흐 카친스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Warszawa)에서 출생했으며 어린 시절 아역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0년 12월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이 되자 핵심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96년 법무장관에 임명되었고, 2000∼2001년 예지 부제크(Jerzy Buzek) 총리 정부에서 다시 법무장관을 지냈다. 2001년 쌍둥이 형인야로슬라브 카친스키(Jaroslaw Kaczynski)와 함께 PiS를 창당하고 초대 당수를 지냈다. 2005년 10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6년 형 야로슬라브 카친스키가 총리로 취임하여, 한 나라의 대통령과 총리를 쌍둥이 형제가 동시에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과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2008년 12월에는 양국 수교 20주년을 맞아 방한하기도 했다. 2010년 4월 10일 푸틴과 러시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 주요 관리 등 유력 인사들과 함께 어떤 추모행사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두산백과)
푸틴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참석하러 갔었던 추모행사는 관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러기 위해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43년 4월 13일 독일군은 러시아의 스몰렌스크 근교에 있는 카틴 숲에서 소련 비밀경찰(NKVD)에 의하여 학살된 뒤 집단 매장된 4100여 구의 시신을 발견되었고 인근 도시의 숲에서도 집단 매장된 시신들이 발견 되었고 그 숫자는 자그마치 약 2만 2000명이나 되었다. 조사결과 희생자들은 다름 아닌 소련의 폴란드 침공 때 포로로 잡혀간 폴란드군의 장교와 경찰·대학교수·성직자·의사 등이었다. 이 학살의 현장은 우연히 발견되었으나 1943년 초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에 패배한 뒤 독일 국민에게 총력전을 호소하고 있던 나치의 선전상(宣傳相) 요제프 괴벨스는 우연히 발견한 이 학살의 현장을 반소(反蘇) 선전 자료로 이용하여 연합군 측을 분열시키려고 획책했다. 그러자 소련은 1941년 가을에 자행된 독일군의 만행이라고 우겼으나, 독일 측의 조사로 1940년 봄 소련 측이 행한 학살임이 입증되었다.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전부터 독·소 양국에 의한 1939년의 폴란드 분할 결과, 소련 측에 억류된 폴란드군 포로의 행방에 비상한 관심을 쏟고 있었으므로 국제적십자사에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소련은 폴란드 망명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소련과의 분열을 피하려고 사건에 말려들지 않았다. 또 폴란드의 저항세력도 아우슈비츠에서 대량학살을 계속하는 독일에 대한 저항을 늦추지 않음으로써 괴벨스의 선전공작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1∼1952년 미국의회에서도 조사한 일이 있으며, 1989년 소련 당국은 비밀경찰이 학살에 개입하였음을 처음으로 인정하였다. 1992년 구소련 붕괴 후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학살은 스탈린의 지시로 이루어졌음이 드러났다. 폴란드가 다시는 소련에 대항할 수 없도록 엘리트들을 모두 처형하라는 스탈린의 지시와 당시 내무인민위원부장관 라브렌티 베리야 등이 서명한 명령서 등이 공개되었으며, 여기에는 폴란드군 장교, 지식인, 예술가, 노동자, 성직자 등 학살된 2만 1768명의 명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름 하여 그 학살을“카틴 숲의 학살”이라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구 소련이 자행한 만행임을 인정하면서도 국가적으로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지금까지 폴란드와 반목하고 있다. 학살 70주년을 맞은 2010년 4월 10일 그날 폴란드의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는 물론 정부 주요 관리 등 유력 인사들과 함께 카틴숲의 추모행사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비행기 사고로 그렇게 사망한 것이다. 서방의 많은 유력인사들은 그 비행기 사고마저도 러시아의 푸틴 정부가 저지른 만행이라고 추측하고 있으나 심증만 굳을 뿐 물증이 없었다.
보은군수 “한국만 위안부 배상 받았는데 계속 사과 요구” 발언 논란
http://www.donga.com/news/Main/article/all/20190828/97156358/2
내가‘카틴 숲의 학살’에 관해 글을 쓴 것은 위의 기사를 보고였다. 그리고 그 기사 아래 ‘가장 용기 있는 제도권 유일의 애국자’라고 했다. 위의 본문이 아니더라도 일본과는 친선을 도모하고 선린 우방국가로 거듭나야 한다고 수천수만 번 외치다가 종래‘토착왜구’가 되었지만, 나 같은 서민이 토착왜구가 되도록 정치권의 그 어떤 놈도 보은군수의 용기 있는 발언 같은 것을 했던 놈이 없었다. 삽살개 정권이나 수권여당을 그렇다 치더라도 소위 야당의 그 어떤 년(놈)도….
러시아는 만행임을 인정하면서도 구 소련의 한 짓으로 팔밀이할 뿐 자산들과는 무관하다며 오리발을 내밀고, 단지 추모행사장에 가겠다는‘레흐 카친스키’대통령 일행마저도 단순사고로 포장하여 끔찍한 만행을 다시 저지른 것이다.
이제 내일 모레면 그날이다.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 007편은 뉴욕을 출발하여 앵커리지를 경유해서 서울로 오던 중 소련 상공에서 소련 요격기의 공격을 받고 사할린 섬 서쪽에 추락했고, 이 사고로 미국 하원의원을 포함한 269명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던 그날 말이다.
이 또한 구소련이 저지른 만행이고 러시아와는 무관 한 것인가? 그래서 한 마디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던 것인가? 36년 간 이 땅을 압제했던 일본 정부가 여전히 그때 그 사람이고 그 시대의 정부이던가? 러시아는 강대국이고 일본은 몰캉한 나라여서‘위안부. 강제징용’등을 보상하고 사과를 요구하는 것인가?
삽살개 개인과 그 패거리들의 정치적 사익(私益)을 위해 국익(國益)을 포기한 한. 일 간의 지소미아 폐기가 결국은 한일 갈등과 한미 균열로 비화하기에 해 보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