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도벌꾼이 있는데 도끼 자루가 망가졌다. 도끼자루를 구할 겸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 보니 도끼자루 감 보다 재목(材木)이 될 만한 나무들이 꽤 있다. 그는 그 무리에 속삭였다.“내가 너희들 옆에 있는 잡목을 다 제거해 주면 나는 땔감으로 쓰고 너희는 좋은 환경에서 맘껏 자랄 것 아니겠니? 이런 걸 누이 좋고 매부 좋다고 하는 거야. 그러니 단단하고 좋은 도끼자루 감 하나 소개해 주지 않으련?”
나무들이 들어 보니 그렇게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또 귀에 솔깃하여 무심코 아주 단단하고 좋은 나무 하나를 그에게 소개해 주었다. 도벌꾼은 그 도끼자루 나무를 잘 다듬어 도끼에 맞추자마자 숲 속으로 되돌아가 오히려 잡목은 그대로 둔 채 재목될 나무들을 찍어 넘기기 시작했다. 이상 이솝우화 한 토막을 약간 각색해 보았다.
심상정 “표 도둑질하는 與 비례연합당에 우린 몸 못 담아”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18/2020031803181.html
나는 가끔 왕따와 구타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한다. 왕따 시키는 놈들만 나쁠까? 왕따 당하는 놈은 단순히 피해자일까? 고장난명(孤掌難鳴), 세상엔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안 나는 것이다. 순순히 왕따를 당해 주는 대상이 있으니 왕따를 시키는 것이다. 나 자신이 왕따의 대상이 되었다면 죽기 살기로 항거(抗拒) 해 보지도 않고 세상을 비관하며 고층 아파트로 올라가거나 한강 다리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고….
뭐? “표 도둑질하는 與 비례연합당에 우린 몸 못 담아?”, 이제와 이러는 건 절규(絶叫)야 항거야? 비단 심상정 뿐인가? 아무 생각도 없이 도벌꾼의 꼬임이 넘어가 자신들이(+4) 도끼에 찍혀 쓰러질 줄 상상이나 했을까? 잡목이 있건 없건 그나마 거목으로 자라났으면 욕심을 부리지 말았어야 했다. 잡목이 저희들 자양분을 빨아먹고 자라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 마치 잡목만 없어지면 저희들이 더 큰 재목으로 클 수 있겠다는 과도한 욕심.
그런데 현실은 도벌꾼이 꼬드겨 가며 없애 주겠다고 큰 소리 친 건 잡목(雜木)이 아니라 도벌꾼이 아무리 좋은 도끼를 가졌어도 찍어낼 수 없는 거목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도벌꾼은 잘 벼린 도끼와 +4가 제공한 단단한 도끼자루로 아쉬운 대로 그것들을 찍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4+1, 도벌꾼의 도끼 한 자루가 4그루의 재목(材木)을 찍어 넘긴 격이다. 아니다 실컷 왕따의 대상이 되어주고 이제야 온전치 못한 세상을 비관하고 고층 아파트에 올라가‘왕따 시키는 더러운 세상’이라며 절규(絶叫)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다른 나무는 뿌리 채 뽑힐 것 같지는 않은데 심상정은 뿌리마저 뽑힐 위치에 있으니…. 정의 없는 정의당은 싹이라도 남아날 것 같지 않아 해 보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