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동란이 일어나고 흥남철수 같은 비극이나 아비규환만 있었던 건 아니다 .전쟁초기에 우리군은 낙동강전선까지 북괴에게 밀렸지만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 했던 게 소위928수복이다. 그런데928수복의 기쁨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집안이 쑥대밭이 되고만 날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내자호텔(종로구 내자동에 소재했으며 최초의 주한미군사령부, 현재는 서울지방경찰청청사든가?)뒤 편에 있었는데 928수복 전까지 인민군 잔당의 본부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국군이 진격을 해 오며 잔당을 향해 쏜 박격포탄이 불행하게도 우리 집으로 떨어져 당시 수송초등학교(현 종로구청 위치)3년이든 우리 형님은 왼쪽 대퇴부까지 잘려나갔고, 어머니는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당시 세 살이었던 나 역시 척추 어딘가에 파편을 맞았다고 얘기했지만, 이 날까지 멀쩡하게 지내고 있다. 의료시설이나 외과적 기술이 오늘날에 비하면 형편없었을 텐데…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1.4후퇴 때 피난을 내려갔던 것이다.
왼팔이 어깨죽지까지 떨어져 나간 어머니는 고사하고 대퇴부까지 완전히 잘려나간 형님의 삶은 곤고(困苦)하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란다. 초등학교 3년짜리가 당했어야할 모멸감(侮蔑感)을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다리 병x’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내가 어느 정도 철이 들고부터 난 참 많이도 싸웠다. 또래와 놀면서 무심결에라도 형님을 비하하는 놈들이 있으면 나 보다 덩치가 크든 나이가 많든 우선 주먹부터 날리고 무조건 뒤엉켜 싸웠던 것이다. 그렇게 형님을 위해(?) 싸움을 하면서도 때론 형님으로부터 타박(打撲)을 받을 땐 내 입으로 형님을 향해‘다리 병x’이라는 패륜(悖倫)을 저지르며 달아나면 그 분함을 참지 못한 형님이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따라오면‘절뚝발이’라며, 마치 상처 난 데 소금을 뿌리듯 보다 가혹한 패륜을 저지르기도 했었다.
그 땐 그랬었다. 전화(戰禍)가 휩쓸고 간 다음 휴전이 됐을 때 전상자(戰傷者)는 물론 내 어머니나 형님처럼 민간 중에도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폭격의 피해자가 많았었다. 소위 상이용사(傷痍勇士)라 하여 전상을 입은 제대군인들이 먹고살 길이 없어 목발과 지팡이에 의지하여 구걸하는 것이 보통이고 여사(餘事)였던 그런 시절이 분명 있었다. 국가를 위해 전쟁터에서 싸움을 하다 다친(戰傷) 군인도 돌 볼 겨를이 없었던, 민간의 피해는 아예 입도 벌리지 못할 그런 시절 말이다.
일제에 의한 강제징집 내지 징용에 대한 보상은 근 한 세기가 지났어도 악착을 떨며 보상을 요구하는데 625라는 동족상잔(同族相殘)에 의해 입은 피해보상은 아니 보상은커녕 사과 한마디 못 받아내는 나라가 오늘의 현실 아닌가?
그나마‘병x’들에게 약간의 혜택을 주기 시작한 게 516혁명 이후부터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하며 오늘에 이르렀고, 이제 물리적이나 강제(?)가 아닌 선천적 불구(具)까지 국가에서 케어해 주는 복지국가가 되었지만 유별난 내 형님은 수 년 전까지 국가에서 주는 혜택이나 케어를“병x증”이라며 마다했었다.
형님은 그러한 신체적 조건 때문에 청소년기에 네댓 차례‘극단적 행동’을 시도하여 축 널어진 형님의 모습을 두세 차례 직접 목격하기도 했었고 그 때마다 다행히 생명을 연장해 오셨지만 지금까지 동정(童貞)을 간직한 총각으로 살아계신다.
사실 형님은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삶만큼 젊은 시절 술과 담배 그리고 온갖 잡기로 세월을 보내셨고 그러다 신학(神學)에 입문한 뒤 목사안수를 받고 조그만 개척교회를 할 때도‘병x증’ 받아들이지 않다가 그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70대 중반이었던 5~6년 전부터였다. 이를테면 독거노인으로서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고 누군가 또는 어딘가에 기댈 수밖에 없는 노구(軀)가 되어서야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형님의“병x증”은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다.
솔직히,,,, 지금 형님과는 모모한 사건 때문에 거의 절연(絶緣)하다시피 살아가고 있고 다른 형제자매를 통해 형님의 소식을 간간이 듣고 있다. 년 전부터 이래선 안 된다고 명절 또는 조상님 제사(차례나 제사는 내가 지내고 있음) 때 오십사하고 간청을 드리지만 아직도 마음이 안 풀리셨나 보다. 지난 설 차례를 지내고 동생들을 대동하여 한 번 찾아봬야겠다고 공언을 했지만 갑자기 코로나 사태가 발생한 관계로 피일시차일시(순전히 핑계지만…)미루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코로나가 극복되는 대로 꼭 찾아봬야지…
유세중인 황교안에 장애인 단체 전동휠체어 돌진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200410/100600183/2
<<<연대 측은 지난해 8월 황 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미사일 도발에는 벙어리가 돼 버렸다”고 말한 것을
문제 삼으며 “사과하라”고 소리쳤다.>>>
내 형님은 대화 중 가끔“병x”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그게 오히려 듣는 이(나)로 하여 거북해 하면“병x을 병x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냐?”라며 역정을 내시곤 했다. 중요한 건 육체가 아니라 마음의“병x”들이 더 큰 문제라며….
‘벙어리’, 벙어리를 한자로‘룽야(啞)’라고 한다. 글 풀이를 하면‘귀머거리 농(聾)’, ‘벙어리 아(啞)’이다. 즉 선천적으로 귀를 먹어 타인의 말을 듣지 못해 언어까지 장애가 생긴 것이다.
위의 기사를 보고‘웃픈’사실은 듣지도 못한 사람들이‘벙어리’라는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으며 북괴의 파렴치한 패륜을 성토하기 위해 한 말을 왜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 이거다. 듣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저들이 북괴 대변인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그런데 정말 더‘웃픈’사실은‘벙어리’가 휠체어를 타고 돌진하며 “사과하라”고 소리쳤다는 것이다. 이 거 벙어리 아니잖아? 아니 요즘 벙어리는 말도 하고 휠체어 타고 다니나?
난 그 기사에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다.
ㅋㅋㅋㅋ…
요즘 벙어리는 말도 하고 휠체어 타고 다니나?
참 가지가지 한다.
데레사
2020년 4월 13일 at 4:41 오후
내자호텔 자리가 지금의 서울경찰청
청사 맞습니다.
그 내자호텔은 내국인은 출입금지엤어요.
그 한쪽 마당을 서울청사 짓기전에 경찰교육장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잘 알지요.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돌아가시기전에 꼭 찾아
뵈어야겠습니다. 형님도 참 힘들게 사셨군요.
요즘 벙어리들 웃기네요.
ss8000
2020년 4월 14일 at 4:58 오전
아! 제 기억이 틀리지 않는 군요.
80년대 중반까지도 사직터널을 오가다 보면
그 호텔이 남아 있었던 것 같기도…
사실 요즘의 호텔과 비교하면 호텔이라고 하기엔 좀…
형님! 참 애증의 교차하는 분입니다.
아마 누님과 동년배 일 듯 싶습니다.
솔직히 병x들 고집이 좀 셉니까?
또 욕심은…. 절대 자신 것은 양보할 생각 안 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장애아들의 특성 같습니다.
뵈야죠. 당연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