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묘하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5(일설에는 13일이라고도 한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시작되어 자그마치 7년이라는 세월 간 벌어진 전쟁이다. 7년 동안 무수한 대소 전쟁이 있었지만 그 중 3대 대첩(大捷)이 있었으니 그 첫 번째가 한산대첩이요 두 번째가 행주대첩이며 마지막 세 번째가 진주성 대첩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같은 해 10월 6일 진주성 앞에 몰려온 왜군의 수는 30,000명이 넘었고, 성을 지키는 조선군의 수는 3,800명이었다. 그날부터 10월 11일까지 5일 간 벌어진 총 10회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완승을 거두었지만 사상자는 1천여(사망800)였고, 왜군의 사망자는 1먼여 명이 넘었다. 진주성 대첩은 그렇게 아루어 진 것이다.
대충 10: 1의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승리를 거둔 진주대첩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회자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많은 관심을 받아야 하는 전투가 있었으니 다음 해 1593년 6월, 진주성 앞에 93,000명의 왜군이 몰려온 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이때 진주성을 지킨 조선군은 관군 3,000명과 의병 2,800명으로, 17대 1의 싸움이었다. 특히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 이끄는 관군에게 크게 참패했던 기억이 있던 왜군은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진주성으로 몽땅 집결시켰다.
드디어 하루에도 수차례씩 치열한 공방이 오가고 8박 9일 동안 24회에 걸친 전투는 조선군이 모두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9일째 되던 날 폭우에 동문 성벽이 무너지면서, 그 틈으로 밀려온 왜군에 의해 끝내 진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결국 슬프게도 조선군과 6만 명의 수많은 진주 백성이 학살당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완패를 한 것이다. 그렇게 패배한 전투였기 때문에 역사는 수치로 알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패배는 그냥 패배가 아니었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은 1차 전투보다도 더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왜군 38,000명을 사살했던 것이다. 그 전투로 왜군 주력의 140%를 잃은 왜군은 결국 부산 이남으로 퇴각해야 했던 것이다.
이 아침 일어나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이 5백 수십 년 전 벌어진 임진왜란 그날입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아군(보수)은 군세(軍勢), 전비(戰費), 군사(軍士) 전열(戰列) 등에서 어느 것 하나 적에 미치지 못하고 중과부적입니다. 그런 열세임에도 법에 정해진 대로 벌여야 하는 결전(決戰)의 날입니다.
위에 밝힌 대로 우리 보수는 어느 것 하나 적들 앞에 내세울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냥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습니다. 문제는 현금(現今)의 우리 보다 미래의 자손들에게 불행을 안겨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싸워야 합니다. 지난 날 월왕 구천은 5천의 병사로 70만 오나라를 격멸하고 남쪽을 통일 지배했습니다. 싸웁시다. 옥쇄(玉碎)하는 심정으로 죽기 살기로 싸웁시다. 625동란 초기 우리 군의 열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났었지만 우리는 미국과 맥아더 장군이라는 걸출(傑出)한 지휘자와 함께 실지(失地)를 회복하고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 심정으로 오늘의 전쟁에 임합시다. 나갑시다. 싸웁시다. 죽기 살기로… 오늘 이후의 모든 영광은 우리의 것입니다. 국민 만세!! 보수 만세!! 통합당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