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땐 군사기밀이라 입도 벙긋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지만, 이제 이 따위 고전은 군사기밀이 아니라 내 경험의 일부이기에 털어 놓는 것이다. 지금도 그 교육장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백의리였다.
가끔은 그런 상념에 젖어들 때가 있다. 군대라는 집단이 없었다면 나(我)라는 인간은 어찌 되었을까? 요즘 애들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우리 크던 시절엔“사내라면 군대 가야 철든다.”라는 게 보편적 생각이었다. 사실이 그랬고…..
십대 후반 20대 초반은 젊음만 믿고 오기(傲氣)와 객기(客氣)를 부리는 시기다. 용솟음치는 객기를 어찌하지 못해 사건. 사고를 가장 많이 저지르는 세대. 그런 객기와 오기를 다독여주고 잠재워 주는 곳이 바로 군대였다. 오죽했으면‘군대 간 놈 치고 효자 아닌 놈 없다’라고 했을까? 이 말 역시 틀린 말 아니다. 제대 후 그 다짐이 여름날 삼베 잠방이 방귀 빠져 나가듯 하지만.
입대 날 아버지께 넙죽 절을 올리자 우리 아버지 달다 쓰다 말씀 않으시고‘너 같은 놈은 군대 가서 고생 좀 해야 한다.’(사실 우리 아버지 몸이 허약하셔서 군대를 가지 않으셨고 내 위로 형님은 625때 한 쪽 다리를 잃어서 군대를 못 갔다, 따라서 우리 아버지 군대의 고생이 어떤 건지 또 자식을 군대 보내면 어떤 심정인지도 모르시면서…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무책임한 말씀을 하신 거다.)라시며 마치 동네 양아치 군대 보내듯 하시는 거다.
그래! 굳이 아버지 말씀이 아니더라도, 옛날 어떤 대통령이라는 자의 말대로 군대 가서 3년 푸~욱 썩고 오면 다음 세상은 뭐가 되도 되겠지…하는 생각으로 입대를 하고 논산훈련소 28연대의 기초훈련을 마치고 103보충대에서 소위 자대에 배치된 것이 화천 골짜기 7사단. 원래 나의 주특기는 105박격포였기에 사단교육대에서 4주 훈련을 마친 후 예속된 3개 보병연대의 어느 한 부대로 배치가 되는 게 정상인데 4주째 마지막 날이던가? 어쨌든 장교(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와 함께 근무를 할 장군 전속부관)한 분이‘오병규’를 찾더니 관물 챙기라고 하고는 무조건 찦 차에 타라는 거다. 골짜기를 빠져나와 두어 시간 아니면 그 이상 달렸을까? xx포병사령부.
어쨌든 무슨 연고인지 모르나 자대 배치 후 두세 달 만에 BOQ(독신자 장교 숙소) 관리병(말이 관리병이지 소위 따까리였다.)으로, 그런데 다시 두 달 후 사령관 CP 당번으로, 한 달이 채 안 돼 이번엔 사령관님 숙소 당번병으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이미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이야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짐작들 가시겠지만, 군대라는 게 집합. 훈련. 점호. 불침번 그 어느 하나만 열외라도 군대 한량(閑良)하다고 하는데, 영외거주에 사령관 당번병 일원이라니…상상들 가시겠는지… 이 건 편한 게 아니라 너무 무료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말씀 하시기를‘군대 가서 고생 좀…’하고 오라고 하셨는데 고생은커녕 너무 편한 나머지 무료한 관계로 바깥에 두고 온 영자나 숙이 생각만 나고 이러다 탈영하는 게 아닐까?
사람이 아주 죽으라는 법은 없는 법. 탈영까지 고민하던 그 무렵 정보처(G2)사무실 문짝에 교육 자원자를 찾는다는 방(榜)이 붙어 있었다. 논산훈련소에서 배정받은 병과는 105(박격포)였으나 졸지에 포병이 된 후로는 144(측지병)으로 전환이 된 관계로 나의 소속은 정보처였었다. 그런 방을 본 후 내가 가겠다고 자원을 하였으나 정보처에서는 사령관이나 잘 모시라며 보이콧을 놓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사령관님 저녁식사 상을 올리고 그 옆에 다소곳이 무릎 꿇고 앉아, 군대 오기 전의 사생활과 아버지의 간곡하신 말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곳은 너무 편하고 무료하여 이런 생활이 지속되면‘탈영을 할 것 같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려가며 애틋한 사정을 말씀을 드린 결과 사령관님의 허락을 받아 내고야 말았다.
서두에 밝혔지만, 지금도 그 교육장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백의리였다. 한탄강을 옆에 두고 교육장이 있었다. 주한 미8군 예하 미2사단 사령부라고 기억하고 있다. 내가 교육생으로 자원하고 그곳에 가기 1년 전이든가? 미2사단이 8군에서 빠져나가 철수한 것으로 또한 기억된다. 서론이 너무 길었나보다.
사실 내가 받은 교육이 바로 오늘날 북괴가 가장 두려워하는‘삐라(전단)’살포였다. 당시는 남북이 피차 확성기로 심리전을 펼치기도 했지만, 양측이 서로 삐라 뿌리기를 병행(竝行)하던 시절이었다. 한편으로는 북의 삐라를 학생들 주워 신고하면 학용품 등으로 포상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삐라는 확성기와는 달리 장소를 이동해 가며 비밀리에 살포를 했었지 오늘날 같이 저런 식으로 요란하게 하지를 않았다. 양측이 서로 내 것이 아닌 양 시치미를 떼고 살포를 했던 것이다.
당시 삐라살포 과정을 기억해 봐야겠다. 천체경이라고 있다. 이게 군용으로 한정 되어 있는지는 잘 모른다. 360도 회전이 가능한 일종의 천체망원경이다. 그리고 모든 작전은 달도 없는 캄캄한 밤중에 개시한다.
- 중형풍선에 수소가스를 충전한다.
- 풍선의 끝에 습전지에 의해 깜빡이는 등(용어를 다 잊어 먹었다)을 달고 날린다.
- 천체경으로 깜빡등을 추적한다.
- 작전일의 풍향(風向), 풍속(風速)을 계산한다.
- 풍향(북쪽)과 풍속의 계산이 끝나면 대형 풍선에 5만원권 보다 조금 큰 삐라를 매단다.
- 그날의 풍향과 풍속에 따라 살포 처(평양상공, 신의주상공, 아오지탄광 등등)정한다.
- 삐라와 풍선 사이의 연결 끈을 녹여주는 용액을 주사한다. 역시 살포 처를 계산한 용액.
(용액에 따라 이음 실(끈)이 녹아내리며 원하는 적의 상공에서 전단이 살포 되는 것이다)
솔직히 반세기 전의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는 부분과 일부 순서가 바뀔 수 있으나 아무튼 그런 식으로 심리전을 펼쳤었다. 당시 그 교육을 받은 1기로서 혹시 후배 교육생이 계시면 잘못 된 부분을 지적하시거나 바로잡아 주시기를….
얼마 전 현 정권의 어떤 놈이 전단 살포를 막는데 군대를 동원 하자는 얘기를 했지만, 사실 동남풍(東南風)이 부는 것을 보고 작전을 개시했지만 날씨의 급변으로 삭풍(朔風)이 몰아칠 때가 있다. 그때는 우리가 보낸 삐라가 우리 지역으로 날아와 온 천지에 흩어지기도… 그 거 수거 하느라고 우리 군대가 동원 된 적도 왕왕 있었다. 그 게 우리 군대가 필요한 이유다. ㅋㅋㅋ…
덧붙임,
박상학 대표는 삽살개가 저토록 기를 쓰고 막겠다면 내게 연락하시오. 우리 마당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띄웁시다. 큭……
아~! 생각 난 게 또 하나 있다. 우리 측 삐라는 그 때 빠닥빠닥한 모조지로 총천연색으로 인쇄가 됐으나 놈들 것은 흐늘흐늘 마분지(요즘 애들 마분지를 알랑가 모르겠다. 말똥으로 만든 종이를 이름이다.)로 단색 인쇄가 된 아주 조악한 삐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