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표(座標) 1부

지난 달‘대북삐라 살포’사태로 정국이 시끄러울 때, 기실‘대북삐라 살포’기술교육을 받고 요원들과 함께 근무(작전)했던 경험을 이곳 게시판에 피력했지만, 그 작전이 끝나고 원대 복귀하자 나는 다시 원치 않는 사령관님 숙소로 배치되어 제대 전까지 3대를 모시는 영광을 안았다.

 

빡센 군대생활을 통해 뭔가를 배우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장군 당번병이라는 게 너무 한량(한가)해 오히려 군대 오기 전보다 더 게으르고 나태한 생활을 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삐라교육’도 자원해서 갔었던 것이고 원대복귀하면 다른 업무와 함께 전우들과 본부막사에서 부대끼며 생활할 줄 알았는데 그야말로 사령관 숙소로 원대복귀라니…

 

문제는 세 번째(내가 모신 순서로…)로 부임한 사령관이다. 육사11기로 정식1기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양반이었다. 즉, 전두환이나 노태우와 같은 기수(하긴 그 당시는 훗날의 전두환이나 노태구 될 줄 상상도 못했겠지만…)라 그랬던지 전임 두 분의 사령관 보다 깐깐하고 냉혈한(?)기분이 드는 그런 인물이었다.

 

부임 후 며칠 수발을 들어본 즉 여느 사령관님들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순탄치 않을 것 같았고 또 그 때가 3년여 군대생활 중 6개월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본부(막사)로 올라가면 오히려 졸병들의 수발을 받을 수 있었기에 본부 포대장과 인사계에 소원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한‘no’였다. 어차피 제대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사령과 숙소 귀신이 되어 제대하라는 것이었다.

 

사령관 부인은 좀 이상한 여자였다. 어쩌다 전방의 남편이 있는 곳에 오면 식사나 빨래 등 주부로서 해야 할 일을 전혀 않고 우리 당번병(나를 비롯한 CP당번. 요리(쉐프)병. 운전병)들에게 몽땅 시켰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속에 가장 고참 이면서도 사령관 부부의 수발은 내가 들어야 했다.(왜냐하면 단순한 당번병은 아무 기술이 없기에 그럴 수밖에…)삼 시 세끼 밥상 나르기, 파리가 낙상할 정도의 전투화 닦기, 군복 칼날처럼 다리기, 빨래하기 등등. 이부자리만 같이 않고 주부가 할 일을 도맡아 해야 했으니 대한민국 국군의 한 사람으로 존심도 상하고 똑 같은 일의 연속이라 지루하기만 했었다.

 

일은 엉뚱한 데서 터졌다. 사령과 부인은 자신의 속옷까지 벗어서 빨래를 시키곤 했었다. 뭐..요즘이야 세탁기라는 게 있어서 그나마 라도 세탁기에 집어넣으면 되겠지만 70년대 초반이었으니 언감생심…결국 손빨래를 하고 다시 석유곤로에 폭폭 삶아서 뽀송뽀송 말린 후 각 지게 착착 개어 사령관님 침실 윗목(항상 두는 자리)의 차단스에 올려놓곤 했었다.

 

언젠가 사령관 숙소(당번병 방)로 본부의 통신병(나 보다는 하급)이 딸딸이(군용전화)선 점검을 하러 왔다가 퍼질러 앉아 농담 따먹기 하는 중에 석유곤로에 올려놓은 빨래를 보살피는 과정에 하필이면 사령관 부인의 꽃무늬 팬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삶기고 있었다. 그런데 놈(통신병)이 그 과정을 목격한 것이다. “아따! 오 병장님 저거시 머여요?(목포인가 그랬다)오 병장님 저런 거 입쏘이?”.

 

그냥 아무소리 안 했으면 될 것을 나는 대답대신 엄지를 척 세운 뒤 다시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그러자 놈은“흐미~ 흐미~! 먼 이리라요이!? 고런거또 한다요이?”, “이새키가! 쯧!”혀를 차며 입에다 검지를 가져다 대며 아가리 조심을 시키고 상황이 끝난 줄 알았다.

 

그리고 다시 얼마 후의 일이었다. 그날은 사령관의 군복을 다리고 있었다. 당시 국군 특히 육군의 군복 원단이 좋은 재질로 바뀌어 나온다고 자랑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의 섬유산업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그야말로 과도기를 맞은 때였다. 모든 장병이 국산 원단으로 만들어진 군복을 입었건만(전임 사령관님들도…), 유독 새로 부임한 사령관은 색깔만 국방색일 뿐 광이 반질반질 흐르는, 아무튼 사지(serge)원단으로 된 군복이었다. 나는 그날도 사령관의 군복을 다리고 있는데 방문이 덜컥 열리며“오 병장님 멋 허시요이?”, 놈이다(목포출신 통신병). “차아식! 보면 몰라? 사령관님 군복 다리잖아!” 그런데 놈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흐미~ 흐미 이거슨 또 머다요이? 아따! 군복이 아니라 미제 사지 쓰봉 이구마니요이? 사령관님은 미제만 입쏘?” 달다 쓰다 대꾸도 않고 빨래 다리기에만 집중하자 놈은“오 병장님! 나 갈라요” 가거나 말거나…..

 

당시 연대급 이상 부대엔 소위‘보안대’일 개 분소가 있었다.(요즘은 기무사라고 하던가?) 보통 대위가 보안대장이 되어 장병들의 사상. 이념 또는 반공의 일선을 다루는 부대였는데, 당시 우리 부대의 보안대장과 사령관과는 육사 선후배 관계라고 자주 찾아와 술잔도 기우렸기에 나와는 농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숙한 사이였다.

 

목포출신의 통신병 놈과 몇 차례 농담(?)을 주고받은 얼마 뒤, 그날은 저녁상을 막 바치려는 그 때쯤 사령관 방에서 다급한 목소리로“오병규! 오병규!”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전우 정신 차리라며 소리 지르듯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저녁상이고 뭐고 간에 쌍방울에 요령 소리가 나도록 아니면 양말에 빵꾸나도록 달려가 노크를 한 뒤 방문을 열어 보니 언제 왔는지(숙소의 당번병들은 부엌이 달린 방에서 침식을 했고 그 주방의 쪽문으로 드나들었기에 가끔 통보도 않고 찾아오는 인사가 있으면 모를 때가 있다) 보안대장이 사령관과 마주 앉아 방바닥에 죠니워커 빨간딱지(지금은 싸구려지만 옛날엔 참 귀한 술이었고 레드니 블랙이니 하며 등급을 매겼었다. 사령관은 홀로 잘 때 가끔 홀짝였다. 침실엔 요즘으로 치면 간단한 홈 바가 있었다.)한 병을 두고 대구포를 안주 삼아 대작(對酌)을 하고 있었다.

 

얘기를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려 보자. 와! 지금 생각해도 내가 참 대단하다. 어떻게 딱 반백년 전 게 이렇게 생생할까? 사실 그 대구포 사령관 출타 시 몇 개씩 몰래 꺼내 먹었기에 잘 안다. 그래서 기억이 생생하다. 사실 작년 겨울 마을주민들이 동해로 관광을 간다기에 나는 불참하기로 하고 옆집‘최공’에게 건어물 대구(채)포 좀 사 오라고 부탁을 했는데 안주용 포는 없고 러시아산 통대구포를 사왔다. 한 마리 5만원이라며 두 마리를 사왔는데 안주로는 어찌할 수 없고 대구탕이나 끓인다고 무. 파. 기타 양념거리를 잔뜩 넣고 그 중 한 마리를 끓였겠다. 우와~! 세상에~! 이건 완전히 소금덩어리였다. 딱 두 스푼인가 떠먹고 개에게 주고 말았다. 그 중 한 마리가 토막난 채 아직도 냉동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데….대구탕 만드는 법을 검색해 보니 별다른 레시피가 안 보여 아직 용기를 못 내고 있다. 혹시 아시는 분은 소개 좀….각설하고…

 

사령관은 이미 얼굴이 흑색이 되어 있고 보안대장이라는 놈은 그 옆에서 알 듯 모를 듯 한 표정으로 어쩌면‘톰과 제리’에서 고소해 죽겠다는 듯 생글거리는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사령관의 일갈이“너! 이 새끼 생매장 당하고 싶어?”,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저 호통은 뭐고 생매장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2부는 내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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