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번잡함을 피해 이곳 골짜기에 처음 내려올 때,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처형과 처제도 덩달아 내려와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처형은 이곳에 상주하고 처제는 주말에만(아직 서울에 생업이 있다)내려오곤 했다. 나와 마누라는 윗동네, 처형과 처제는 수백m 떨어진 아랫동네에 500여 평의 땅을 사고 정확히 반반을 나누어 한마당에 동서(東西)로 집을 지어 놓고 지낸다. 워낙 우애가 깊은 자매들이라 오순도순 지내는 것 같았다. 그러든 어느 날 처형의 파행(跛行)으로 한마당 두 자매가 앙앙불락(怏怏不樂)원수처럼 지내고 있다.
중간입장인 내가 나서서 몇 차례인가 두 자매(동서도 포함)를 화해시키려고 노력을 했지만, 이건 뭐…삽살개와 똥돼지 관계처럼 완강하고 냉랭하기만 했다. 이러는 나를 마누라는 오지랖 넓다며 지청구를 하지만 자매끼리야 그렇다 치고, 저희들 때문에 동서끼리 무슨 죄인가. 이런 인간관계가 아니라면 난들 굳이….그런데 생각보단 이것들이(동서) 지나치게 저희들 존심만 앞세우기에 난관에 부딪히고 있는데….
아~! 미리 밝히고 넘어가자. 이 썰을 푸는 것은 처형을 탓하자는 것도 모독을 주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서 만난 귀인(貴人) 얘기를 하려다 보니 그에 얽힌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고, 사람 겉모습만 보고 대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도 이번 수해를 입은 대신 귀인의 도움으로 목숨도 구하고 그로 인해 두 집안에 얽힌 난관의 실마리가 풀릴 것 같아서 이 썰을 푸는 것이다
내가 즐겨 쓰는 문구가 몇 가지 있지만, 그 중 하나가“주식형제천개유(酒食兄弟千個有), 급난지붕일개무(急難之朋一個無)라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놀 때는 형이니 동생이니 하는 사이가 천 개나 있으나, 정말 위급하고 어려운 때 도와주는 벗은 하나도 없다.”라는 것이다.
처제(동서)가 그제 이곳에 내려왔다. 처제와 동서지만 정말 두 년 놈이 어지간히 짠돌이들이다. 어떨 땐 처형의 파행이 밉다가도 두 년 놈의 행동을 보면 이것들이 더 한 것 같기도 할 때가 있다. 수해를 입고 목숨까지 위태로웠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위로 차 왔다는 것들이 세상에그 흔한 수박 한 덩이 포도 한 송이 아니 하다못해 음료수 한 병 없이 빈 손으로 왔다.(사실 늘 그랬다. 밥 한 끼 산 적 없고 밥을 사도 꼭 내 호주머니에서…처제와 동서는 내가 중국 상주시 내 도움으로 자영업을 했고 지금도 그 덕으로 가게를 하고 있으며 다주택자로 세금걱정을 할 만큼 잘 산다. 더구나 지금도 필요하면 돈 꾸러 오는 것들이…)내가 그 따위를 즐기지도 않거니와 꼭 먹자는 건 더욱 아니다. 어떻게 형부(동서)집을 몇 달 만에 찾아온다는 것들이….그것도 수재민 위로 차 온다며 맨손체조 하자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싸가지가 없거나 짠돌이거나 둘에게 죽다 살아난 것, 그동안 피해 입은 것, 면정부의 도움으로 복구를 한 것 등등,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귀인(엄 서방)의 얘기를 빼 놓을 수가 없었다. 그의 목숨 건 활약상 얘기를 다 해주고 처제 년과 동서 놈에게“주식형제천개유(酒食兄弟千個有), 급난지붕일개무(急難之朋一個無)의 문구를 들려주며 마지막 크게 일갈을 했다.“야~! 김 서방 그리고 처제가 그런 위기에 닥쳤다면 나를 구해 낼 수 있겠어? 아니 돌아가신 장인 장모라고 구 할 수 있겠느냐고?”라며 소리를 질렀다. 솔직히 맨 손으로 온 것에 대한 삐침도 있었지만 두 집안의 화해를 위한 포석(布石)이기에 더욱 큰 소리로 얘기 했다. 즉 난 너희들 보단 엄 서방이 더욱 소중하다는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말을 밝힌 것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 며칠 3류 막장소설가 공某 여사의 얘기가 지면에 오르내리지만, 난 그녀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처형의 삶(?) 아니면 남성 편력(遍歷)에 머리를 흔들곤 한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처형 개인의 일이기는 하지만 때론 개인의 일들이 마누라나 처제에게까지 영향이 미치지 않을까 또는 입방아를 찧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또는 속상함이 밀려 오는 것이다.
단언컨대 처형은 정말 문제가 많은 여자다. 결혼해 남매를 두었지만 첫 남편이 20대 후반에 연탄가스로 요절을 하고 청상(靑孀)이 되었다. 워낙 미모였다. 혼자살기엔 아까웠는지 아니면 벅찼는지, 수 년 후 아들은 본가에 맡기고 딸만 데리고 재가를 했다. 재가 후 열심히 사는 것 같았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고 꽤 안정된 사람과 결혼을 하고 딸아이 성(남편)까지 바꿔줄 정도로 그는 처형에게 잘했다. 한 가지 특이 사항은 그는 처형보다 여섯 살인가 아래였다. 연하의 남편이라고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처형의 파행은 그 때부터 시작 되었다.
사실 첫 남편과의 사이는 그다지 원만한 편은 아니었다. 폭력적이었다. 가끔 보면 볼 때마다 눈탱이 밤 탱이 였던 것으로 기억 된다. 그랬던 남편에게서 해방(?)이 되고 새 남편을 얻었으면 정말 알공달공 잘 살았어야 함에도 바람을 피다가 걸려 역시 새 남편에게도‘눈탱밤탱’의 역사가 계속 되다 이혼과 방황.
그 즈음 나는 중국에 상주하고 있었고, 그런 처형을 중국으로 불러들여 생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는데, 다름 아닌 한. 중을 오가는 페리 선을 이용한 보따리상을 주선해 주었는데 (훗날)들은 얘기로는 처형이 워낙 미모였던 관계로 그 업계에서 물동량이 가장 큰 대상(大商)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인의 전언에 의하면 딸린 식구도 열 명 이상이고 정말 거금(업계에선)을 모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처형은 그 몹쓸 년의 바람기가 다시 일어 그야말로 조폭도 못 되는 양아치 같은 어떤 놈을 만나 수년 간 고이 까놓은 호박씨를 한 아가리에 털어 넣은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 양아치를 기둥서방으로 두고 또 다른 양아치를 만나 바람을 피우다 구(舊)양아치에게 역시‘눈탱밤탱’되고 땡전 한 닢 건지지 못하고 오히려 맨손(하기는 처형에게도 이 날까지 밥 한 끼 얻어먹은 적이 없다. 처가 가속들은 도대체 맨손체조 국대급인가?)으로 쫒겨 났다는 것이다.
처형의 파행적 불륜 얘기를 하자면 천일야화도 모자라고 그것을 다 밝히자면 손가락만 아프니, 아무튼 처형이 갈아 치운 남자가 거짓말 안 보태고(내가 아는 기억으로만..)공 여사의 두 배는 된다. 그 나머지는 생략하기로 하고….자!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내가 엄 서방을 천대 했던 이유는, 엄 서방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바로 처형의 파행에 걸려든. 마치 교미를 마친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사마귀 같은 존재 같기도, 한 순간의 노리개로 탐닉(耽溺)하다 버림받는 미물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화가 났던 것이다. 정확하게는 처형을 천대했던 것이다. 사실 엄 서방은 처형 보다 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