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색내자는 게 아니다. 장모님 돌아가시기 전 2년여를 내가 이곳에서 모셨다. 약간 치매가 왔지만 병원이나 요양원에 모실 정도는 아니었음에도 아들 두 놈이 서로 제 어미를 못 모시겠다고 팔밀이를 하는 꼬락서니가 너무 볼썽사나워‘그렇다면 내가 모시마..’하고 내 성질 못 이겨 큰소리친 결과다. 모신다는 의미가 그러하듯 마누라와는 주말부부로 있는 관계로 장모님과 두 사람만 생활했으니 내가 모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든 어느 봄날 장모님은 갑자기 돌아가셨고 불가분 장모님의 장례식을 이곳에서 치루 게 되었는데, 물론 모든 처가 식솔이 모두 모여 장례를 치루는 데, 몇 달 째 꼴도 안 보이던 처형이 어디서 연락을 받았는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 옆에는 생면부지의 젊은이가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누구냐고 물어 볼 수도 없고…. 처음엔 대충 짐작을 했다. 아마도 그동안 바람을 피워 사생아로 숨겨 둔 아들놈을 데리고 온 것으로.
(그 사이 금전적인 문제로 처형을 인간 취급 않을 때다)그 사나이를 내게는 소개를 않고 저희 오빠(처남)에게만 소개를 시키고 함께 분향을 할 때까지도 숨겨둔 사생아 때문에 너무 미안해서 내게 소개를 않는 것으로 지레 짐작을 했던 것인데, 워낙 심신이 피곤한 내가 예식장의 쪽방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데 마누라가 달려와 무슨 큰 뉴스 아니 해외토픽이나 되는 양“그 사람 언니 남편 이래요”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기까지 했던 것이다.
문제는 처가의 처남 놈들이다, 그야말로‘듣보잡’ 생면부지의,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듯한 인사를 큰사위 대접을 하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 꼬락서니가 정말 가관이었다. 그런데 장례를 치른 후 알고 보니, 잠시 콩깍지가 끼어 만난 사이가 아니라 정식 혼인신고까지 한 사이였던 것이다. 그런 사이가 된 후부터 처형과 그는 아주 보란 듯 이 마을에 정식으로 신접살림을 차리고 오순도순(?)살고 있지만 나는 그 후 그 불륜(?)의 두 남녀를 인간 취급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내 왔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의 직업은 어선의 기관장이고 원양어선을 타다가 이젠 그만두고 소형어선을 가을에서 겨울까지만 타며 보통9월이면 떠나갔다가 봄이면 돌아오는 좀 생소한 직업이었다. 반 년 정도 일 해서 한 해를 먹고 산다고 했던가? 아무튼 나와는 불심상관의 사나이.
처형은 이곳에 집을 지으며 내게 수천만 원의 부채가 있다. 솔직히 그 돈은 이미 포기한 상태다. 그럼에도 처형의 낯짝은 삽살개 이상으로 두껍다. 경제적으로 쪼들리면(산골에서 그럴 이유가 없건만..)“제부 돈 좀…”결코 받아들여질 부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그런 수작을 벌이곤 했다.
아무튼 그렇게 대면 대면하게 2년여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나도 모르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형과 그 사나이 나이 차가 18세(나와는 23세)라는 것과 나와는 절연(絶緣)하다시피 지내고 있다는 풍문(사실이지만)이 마을에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박달재를 넘다가 마을이 너무 마음에 들어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설고 물 설은 이 마을에 찾아들어 그림 같은 집은 아닐지라도 나름 전원주택 짓고 노년을 보내고 있는 중에 어쩌다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꺼리가 되다니….그래도 이거는 아니다.
하루는 마누라와 나는 처형과 그를 데리고 조용한 식당으로 데려가 인간으로 할 짓이 아니니 서로 왕래하고 살자며 나 자신 마음을 누그러트렸다. 그리고 처형과 그에게 분명히 한계를 지었던 것이다. 즉 족보상으로는 처형의 (정식)남편이지만 내가 그에게‘형님’이라는 호칭을 할 수는 없고, 원래 처갓집 촌수는 개 촌수라고 하는 고로, 오히려 그가 내게‘형님’으로 호칭하는 것으로 조약(?)을 맺으며, 소문에 당신 벌이가 월500만 원이라니 당신 아내가 진 빚 전체 금액의 10% 3백만 원 갚으라고 하자 그는 쾌히 승낙을 했었다.
재작년 8월이든가? 우연히 담도와 담낭에 문제가 생겨 결국 두 차례에 나누어 담도는 넓히고 담낭 즉 쓸개는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웃기게도 그 때 처형도 몸에 이상이 있다며 진단을 받은 게 췌장암으로 판명이 나고 수술을 받은 날이 내가 수술을 받은 날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더러운 인연인지 팔자인지…
처형의 첫 남편에서 낳은 남매는 정말 효녀 효자다. 아들은 50이 가까워 오지만 아직 장가도 안 가고 제 어미 뒷바라지를 하고, 딸아이(사위 포함) 역시 시도 때도 없이 금전을 요구하는 제 어미의 부탁이 곤혹스럽다면서 그래도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딸아이는 처형이 발병하기 1년 전 제 어미를 위해 두 곳의 보험사에 보험을 든 게 있었단다. 그게 또 효녀 노릇을 할 줄이야. 무슨 보험인지 모르지만 두 곳으로부터 약 2억의 실비 보험을 탔다고 했다. 아무리 죄 많은 인간이라도 하늘이 아직 데리고 갈 시간이 아니면 생명연장이 되는 모양인지 그런 행운(?)이 처형이 타고 날 줄이야.
내가 처형을 인간 취급을 않은 계기는 그녀가 암 진단을 받고 거금의 보험금을 타낸 뒤부터다. 어찌됐든 거금이 생기자 엄 서방은“다른 것 다 재껴 놓고 형님 돈300만원은 갚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처형의 단 한마디“그 집은 그 돈 없어도 산다.”그 말 한마디에 처형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던 것이다.
내가 그 돈을 꼭 받자는 것도 아니고 아니 준다고 법적으로 따질 일도 아니고 더구나 거금이 수중에 들어 왔으니 득달같이 달려가‘내 돈 내놔!’라며 엄포를 놓은 것도 아닐 진데…‘그 돈 없어도 산다?’아무리 병들고 수술을 했어도 개만도 못한 개 보다 못한 개 같은 년이라고 저런 년은 빨리 죽어야 인류의 평화가 온다고 악담까지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