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수라는 직업을 선택하려고 했던 게 고교생 때였다. 보통의 소시민들이 그러했겠지만 생활이 힘들고 쪼들리면‘돈타령’을 하게 되지만, 우리 어머니는 그 정도가 정말 심했다. 앉으나 서나‘돈. 돈. 돈…’때론 귀를 막기도 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울분을 달래기도 했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어머니의 돈에 대한 포원(抱冤)을 어떻게 풀어 드릴까? 하고 고심을 하기 시작하는 계기도 되었다.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나오고 취직을 한다 해도 월급쟁이로는(말단 공무원이었든 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보며…)어머니의 돈에 대한 포원을 풀어 드릴 수가 없다는 결론이 오히려 나로 하여 엉뚱한 꿈을 꾸게 만들었던 것이다.
고교2년 때였다. “돌 뿌리 가시 밭 길 산을 넘어 천리 길.. ‘천리 길’”이라는 노래가 내 귓전에 맴도는 가 했는데‘사랑은 눈물의 씨앗, 님 계신 곳’등등… 부르는 노래마다 공전의 히트를 치는 가수가 등장하며 삶에 찌든 대중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것이었다. 당시로는 정말 처음 들어보는 음색이고 창법이었다. 그의 노래를 두고 100년에 하나 나올까 하는 대형가수라고 세상이 떠든 것은 당연했다.
얼마 뒤부터 내가 그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고 있었고 그런 가운데 그의 노래가 내 성대(聲帶)에 녹아나며 거의 완벽(내 생각이겠지만)하게 모사(摹寫)를 잘했었다. (그래! 이거야!)그리고 가수가 되겠다고 생각을 굳혔다. 그 길로 하라는 공부는 제쳐두고 부모님 몰래 음악학원을 다니며 某가수(현역 가수였으며 음악학원을 개원한…)분의 지도를 받으며 꿈을 키워 나갔었다. 물론 이 일이 나로 하여 고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기게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부모님 몰래 공납금(학원비)등으로 음악학원비를 충당하다가 비행이 드러나고 초주검에 가까운 응징을 당했지만 나의 꿈을 접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는 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제자매(7남매)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더욱 의지(意志)와 의욕(意欲)을 불태웠지만 몰래 충당할 학원비도 없어 음악(노래)공부에 대한 향학열(?)이 꺾일 무렵 생각해 낸 게 밤무대였다.
그런데 밤무대라는 게 아주 특출한 실력이나 누구의 도움 없인 진출할 수가 없었고 또한 가수증이 필요했다. 지금이야 이런저런 등용문이 있지만 과거엔 그렇지 않았다. 일반인들은 노래만 잘하면 금방 무대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소위 예총(예술인총연합회)이 있고 그 산하에 각 분야의 분과위원회라는 게 있었다. 당연히‘가수분과위원회’라는 게 있어 그곳에서 발행하는 증을 발급 받아야 했고 그 증(證)을 근거로 작든 크든 밤무대에 올랐던 것이다.
가수 증을 받기 위해서 분과위원회에서 시행하는 일정의 시험과정이 있다. 물론 당연히 실기(實技)도 펼쳐야 하지만, 코오르위분겐(Chorubungen)이라는 게 있다. 음악교과서로 해석이 되겠지만, 어떤 노래의 악보(음표 박자 장단 등)를 보고 노래를 불러야 하는 시험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범위 내의 점수를 받아야만 가수 증이 나오는 것이다.(10여 년 전 이사할 때도 협회증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처박혀 있는지 아니면 버렸는지…).
당시 나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최희준 회장님 앞에서 시험을 치루었는데, 그 분 말씀이 그랬다. “너는 노래는 정말 잘하는데 개성이 없다. 나훈아랑 똑 같이 부른다고 니가 나훈아는 아니지 않느냐? 좀 다른 방향으로 개선 시켜라”그리고 그 증을 발급 받았던 것이다. 그 후 그것으로 큰 무대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미아리(과거 크고 작은 비어홀이 많았었다)나 용산 남영동 일대에서 알바를 하며 시간을 보내든 중 징집영장을 받게 되어 군대엘 갔었다.
내가 가수의 꿈을 접은 것은 결국 나훈아의 노래를 따라 부르지 못하면서였다.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고함을 지르고 군기를 다질 때 목이 아파오고 툭하면 목이 쉬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어느 날부터 기침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고된 훈련생활에도 밤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기침이 심했다. 그게 어떤 과정이었는지는 불과 수년 전에 알게 되었는데, 수년 전 폐 CT검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담당의가 폐결핵 앓은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니랄 수밖에, 그런데 의사는 폐결핵을 앓은 근거라며 사진을 보여 주며“모르고 지나는 경우도 있다”라는 것이었다. 그때 그리도 심하게 기침을 했던 게 폐결핵이었고 그 기침으로 인해 성대가 망가진 것이었다.
지금도 있는 진 모르겠고, 사단 급에‘연예대(군예대)’라는 게 있었다. 후반기 교육대에서의 일이었다. 고된 훈련을 받던 어느 날 연예대와 함께 위문공연단이 온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자청을 하고 노래를 불렀었다. 그 당시는 톰 죤스의‘딜라일라’를 멋지게 불러 꽤 많은 찬사를 받았는데 아마도 그 과정을 연예대장(?)이 본 모양이다. 하루는 일부러 그가 부대에 찾아와 내게 노래를 불러 보라는 것이다. 그 때 부른 노래가 나훈아의 데뷔곡인‘천리 길’이었다. 그리고 ‘연예대’에 들어올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목소리(성대)는 이미 내가 원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가수에 대한 꿈을 접었던 것이다.
중언부언 했지만, 나는 나훈아에 감명을 받아 가수가 되려 했고, 그 반대로 나훈아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어 가수를 포기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나의 우상이었고 내가 살아가야 할 지침을 만들어 준 스승이었다. 물론 노래(가수)를 포기하게 한 동기도 그 때문이지만, 돈이 많거나 큰 부자는 아닐지라도 어머니의 포원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야무진 꿈을 꾸게 한 것도 나의 스승“나훈아”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