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조(外助)는 어려운 것.

 

혹자는 그런다. 은퇴 후 도시와 멀지 않은 한적한 곳에 아담한 전원주택 짓고 텃밭을 가꾸며 유유자적하는 게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라고. 글쎄다. 그런 게 모든 남자의 로망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그런 꿈을 꾸게 된 동기는 한 편의 서부영화를 보면서였다.

 

아마 중학교 2학년 때일 것이다. ‘그레고리 팩’, ‘찰톤 헤스톤’, ‘진 시몬즈’ 등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명우들이 공연한“빅 칸츄리(The Big Country)”라는 영화(내가 본 서부영화 최초의 것)였다. 워낙 명화였기에 토요명화나 설 또는 추석 특집으로 여러 차례 우려먹은 영화이다.

 

솔직한 얘기로 당시 영화의 내용보다는 영화 속의 장면에 시쳇말로 뻑이 갔다. 무한대의 초원에서 말달리는 선구자 아닌 카우보이들의 모습에 그날 저녁 잠자리를 설쳤던 만큼 그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아~! 내가 어른이 되면 저런 초원에 살며 말을 달려 봤으면….정말 잠이 오질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소년의 야무진 꿈은 세파에 흔들리며 잊혀 갔는데,,,,

 

수년 뒤 소년의 가슴에 불을 다시 지핀 사건(?)이 터졌다. ‘카사비앙카(Casa Bianca)’라는 칸초네 풍의 노래가 나오며 세계 음악팬들의 심금을 울리자, 약삭빠른 미국의 팝 음악이 화이트 하우스(White House:백악관이 아닌 글자 그대로의 하얀 집, 카사비앙카도 이태리 말로 하얀 집이라는 의미라는 것을 그때 알았음)로 고쳐 부르며 이 또한 공전의 히트를 치자, 이번엔 우리의 뽕짝들께서‘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하여‘문주란, 패티 김’등이 불러 크게 히트를 시킨 노래가 있었다. 그냥 카사비앙카 였고, 그냥 화이트 하우스였으면, 소년은 내용도 모르고 그냥 얼만 간 유행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다 잊어버렸겠지만,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는 대목에서 지난날‘빅 칸츄리’영화가 연상이 되며 다시 몸살을 앓게 된 것이다. 어째서 ‘언덕 위의 하얀 집’이 ‘빅 칸츄리’로 연결 되었는지는 정확히 유추가 안 되지만 아무튼 그렇게 연상되자 말자 또 다른 사건이 동시다발로 벌어지고 만다.

 

남진의‘님과 함께’라는 노래였다.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가사의 첫머리에‘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평생 살고 싶어~~’ 바로 이 대목이다. 정리를 해 보면, ‘빅 칸츄리’에서 시작하여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이어져 내려오다 끝내‘저 푸른 초원 위에~~…’……..소년의 희망은, 꿈은 도저히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특히 그즈음엔 소년의 대가리가 점점 굵어(?)져 소년에 머물지 않고 청년으로 접어든 시기였으니‘님과 함께…’라는 단어는 가슴까지 절절하다 못해 먹먹하기까지 한 대목이 아니었던가. 그래! 언젠가 어른이 되고 돈을 벌고 여유가 생기면‘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평생 살 거야~!’어디서? 저 푸른 초원에서… 무엇을? 그림 같은 하얀 집을 짓고…..

 

그랬든 소년의 꿈이 환갑이 지나고 두어 해 흘러 이루어지려고 한다. 사실 좀 더 일찍 이루어져야 했으나 준비해 둔 장소가 너무 멀다하여 마누라가 반대 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을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한 장소를 찾아냈으니..(하략)

 

BY ss8000 ON 2. 25, 2011(산골 일기 1부에서…)

 

위의 산골일기를 쓰기 시작한 첫 날의 글이다. 난 언젠가 저 산골일기를 출판할 계획이다. 그러고 보니 세월이 벌써… 만10년이 됐다. 2010년 10월에 이곳 제천, 연고도 없는 이곳을 지나다 무조건 길가의 부동산을 찾아들고 그가 안내하는 이 장소가 워낙 맘에 들어 가격흥정도 하지 않고 혹시 누구라도 채 갈까 조급증이나 그 다음 날로 계약을 하고 오늘까지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머문 다음해였다. 마을 주민들이(70호 가량) 아내에게 부녀회장을 맡아 달라는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아내는 그 직을 3년 간 맡아서 했다. 아내가 부녀회장을 맡으며 오히려 나는 많은 소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면 또는 시 단위 각종행사에 불려 가야했고 심지어 풀과 잡초가 우거지면 동원되고, 눈이 많이 오면, 비가 많이 와도, 마을의 어르신들 봉양 등등…아무튼 마을의 대소사엔 오히려 미을 이장 보다 더 바쁜 처지가 되었다.

 

매년 연말이면 마을의 대동회는 그 노고에 얼마라도 위로한다며 위로금 수십만 원이 주어진다. 그러나 아내는 모든 금액을 부녀회에 희사하거나 마을회관의 식기나 기물 교체하는데 투입했으며 심지어 매년 위로금 이상을 마을에 희사까지 했다.(물론 이것은 내 명의로…)

 

생색내려는 게 아니다. 아내가 3년 간 세운 헌신은 우리 마을의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때 나는 아내에게 불만이 많았다. 한 해만 하고 그만두라고 종용을 했지만 결국 3년을 악착(?)같이 한 뒤 물러났다. 3년씩이나…다시 강조하지만 생색내자는 게 아니다. 나의 외조가 없었다면 아내는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3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불만 불평을 토로한다고, 즉“말린다고 말려질 아내가 아니었다.”

 

사실 아내가 3년 후 그 직을 그만 둔 이유는 더욱 명확하다. 우리는 지금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다. 물론 내가 서울 집으로 가는 경우도 있고 아내가 이곳으로 내려오는 경우도 있다.

 

아내가 부녀회장 4년 차에 들어설 무렵, 작지만 가업이라고 물려 준 가게를 아들놈이 맡아서 하다가 저와는 도저히 적성이 맞지 않고 다른 사업(衣類)을 한다며 뛰쳐나가는 바람에 아내가 다시 맡아야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주말 부부가 되고만 것이다.

 

이제 내 나이 70이 훌쩍 넘었다. 손수 밥 짓고 먹거리 만드는 건 요리사는 못 돼도 충분히 해왔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꾸 외롭고 힘들어 진다. 그래서 아내와 약조를 했다. 아깝지만 금년 내에 모든 것을 처분하고 이곳에 완전 정착을 하는 것으로… 모든 계획이 착착 진행 중이다. 가게도 지난 주 팔았고 가게의 재고는 반값으로 동업자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아내는 금년 말 이곳으로 내려오면‘마을이장’을 한 번 해 볼까? 하는 농담을 한다. 두 늙은이가(아내는 나 보단 8살 적지만…)얼굴만 쳐다보고 살 수 없다. 그래서 그랬다. 한 번 도전해 보라고! 내가 외조(外助)는 해 줄 테니…

 

“말린다고 말려질 남편 아냐” 국감장 빵 터뜨린 강경화 답변

https://news.joins.com/article/23888700?cloc=joongang-home-newslistleft

 

외조란? 가정사 정도는 희생이 되어도 감수를 해야 한다. 며칠 전에도 얘기 했지만, 이 일병은 마누라 강경화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강경화가 가정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그 보다 이 일병은 문재인을 더 우습게 알고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주요회의에서 뺄 정도로 무시하는 강경화를 붙들고 놓아 주지 않는 문재인을 걷어차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외조는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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