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黃奎)라는 인물이 있다. 그의 집안은 누대(累代)를 이어오며 漢황실에 녹을 먹은 충신가문이다. 조조의 전횡(專橫)을 견디다 못한 漢헌제가 그에게 나라와 황실의 재건을 부탁하며 비통한 눈물을 짓자, 분연히 일어나 조조를 주살(誅殺)시키겠다고 황제 앞에서 맹세를 거듭한 뒤, 서량태수 마등과 모의하며 계획을 짰으나 일이 잘못되어 발각되는 통에 모진 고문 끝에 마등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인물이다.
황규에겐 묘택(苗澤)이라는 처남이 있었고 또 애지중지하는 애첩이 있었는데 이름이 이춘향(李春香)이라고 했다. 그런데 황규는 이미 환갑을 지난 노인이었고 춘향은 이팔청춘을 갓 넘긴 물오른 농염(濃艶)한 여인이었다. 뒷얘기는‘썰’을 풀지 않아도 이미 짐작이 가실 것이고…. 춘향의 물오른 몸뚱이가 묘택을 그냥 두지 않았고, 결국 묘택(苗澤)과 춘향(春香)은 늙은 황규 몰래 간통을 일삼는 불륜 관계 즉, 간부간부(姦夫姦婦)가 된 것이다.
대충 얘기를 다시 정리하면, 황규와 서량태수 마등이 조조를 제거 시키는 거사를 도모한 후 거사 일을 앞두고, 흥에 겨워 애첩 춘향을 품안에 품던 날 춘향은 이미 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다 늙은 황규에게 꼬리를 치며 아양을 떨자 황규는 그만 거사를 자랑스럽게 털어 놓는다. 옛날부터 큰일은 마누라에게도 털어놓지 말라고 했는데, 어리석은 황규는 국사(國事) 그것도 거대한 음모를 한갓 애첩 나부랭이에게 자랑스럽게 털어 놓고 만 것이니 어찌 하늘이 모른 척 할 수 있었겠는가?
이 사실을 춘향은 묘택에게 일러 바쳤고 욕정(欲情)에 미쳐버린 묘택은 자신의 매형을 배신하고 조조에게 그간 황규의 집에서 벌어진 모의(謀議)의 전말(顚末)을 고발한 것이다. 물론 황규를 없앤 후 눈치 볼 것도 없이 두 년 놈이 붙어먹겠다는 간악한 잔머리를 굴린 것이고, 결국 모의는 발각되어 모진 고문 끝에 황규는 마등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 해가 서기210년(단기2443년, 漢헌제 건안15년, 신라 내해이사금15년, 고구려 산상왕14년, 백제 초고왕45년)이다.
위 사태의 뒤 담화. 아무튼 사태는 그렇게 끝나는 듯 했다. 즉, 황규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춘향과 묘택은 누구의 눈치도 볼 것도 없이 24시간이 아깝다고 붙어 있었다. 그런데 며칠 뒤 조조는 묘택과 춘향을 조용히 따로 승상부로 불러들였다. 조조 앞에 불려온 묘택과 춘향은 큰 상이라도 받을 줄 알았지만, 두 년 놈을 불러들인 조조는 갑자기 호통을 친다.“네 이놈! 계집하나로 인해 네 매부를 죽게 만들었으니 너 같이 불의(不義)한 인간을 살려두어 무엇 하리!?”역시 묘택과 춘향을 그 길로 저자 거리에서 참수(斬首)하니 두 년 놈이 함께 목 없는 귀신이 되었다. 간웅의 대명사 조조가 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세인들로부터 칭찬을 들은 적이 없었지만, 후세 사람들이 삼국지를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러“그 놈 제법이다.”라는 칭찬(?)을 했다는 것이다. 갑자기 위의 얘기가 왜 생각이 났을까?
黨의 에너지라던 ‘문빠’, 이젠 黨의 족쇄로
https://www.chosun.com/politics/assembly/2021/01/05/YD5FJBUG4ZEM3EKNMMC5NHBAGI/
소위‘대깨문’과 탄핵 당한 박근혜를지지 했던 콘크리트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결론을 먼저 내리자면, 지지하는 인물만 다를 뿐, 대깨문이 콘크리트고 콘크리트가‘대깨朴’이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박근혜가 탄핵될 당시 그래도 믿고 의지했던 세력이 콘크리트였지만 탄핵운동의 밑거름이 된 촛불시위의 일원(一員)으로 돌변(突變)했던 것이고, 그 단단하던 콘크리트가 박살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박근혜는 박살이 나고만 콘크리트를 지나치게 믿고 안주(安住)했다가 변(變)을 당한 것이다.
결국 대깨문들이 현금(現今)에 이르러 黨의 족쇄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은, 마치 지난 날 박근혜의 콘크리트 기반이 서서히 허물어져 가는 현상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두지지 세력이 명확(明確)히 다른 점은 박근혜의 콘크리트 세력은 정의(正義)와 공정(公正)을 택한 점이고, 대깨문의 난동(亂動)은 아직도 자신들이 모든 불의(不義)와 부정(不正)한 개수작 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조국 사태. 추미애 사태 그리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현 정권의 오만(五萬)가지 오만(傲慢)스런 작태(作態) 그 어느 것 하나 정의(正義)와 공정(公正)이란 단어가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없는 것이다. 이런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참상(慘狀)이 벌어질 때 나타난 이가 바로 윤석열인 것이다.
생각을 가다듬어 보자. 우리가 과연 처음부터 윤석열을 사랑했던가? 유치한 표현으로 그는 아군이 아니라 적군이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가 그에게 찬사(讚辭)를 보내고 박수를 치며 연호(連呼)하는 것은, 조조가 간부간부(姦夫姦婦)였던 묘택과 춘향을 징치(懲治)하는 모습과 같았기 때문이다. 비록 시대의 간웅(奸雄)이라고 폄하하고 있지만 그 나름의 정의(正義)와 공정(公正)함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호소하고 싶다. 윤석열 개인은 미울지라도 그의 법치주의에 입각(立脚)한 정의(正義)와 공정(公正)을 사랑하고 지지해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