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불손한‘국힘당’, 기고만장한‘김종인’

사례1):

허유(許悠), 남양(지금의 하남성 南陽)사람으로 자는 자원(子遠)이며 어려서부터 조조와는 친구였음. 漢헌제 초평2년 원소가 기주를 차지하고 , 그에게 자신의 또 다른 모사인 전풍. 저수. 봉기 등과함께 그 지방을 나누어 관장하게 했음. 漢헌제 건안4년 원소가 조조를 토벌하려하니 표를 올려 적극 적극 찬성함. 다음해 원소와 조조가 전사(戰史)에 남은 관도대전을 벌일 때, 그는 원소에게 군사를 나누어 당시 조조의 본거지인 허도(許都)를 공격하여 양쪽에서 협공할 것을 건의 했다가 원소로부터 퇴박과 함께 크게 꾸중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고 조조에게로 도망친다.

 

얼마 뒤 조조 수하의 맹장 허저(許楮)가 한솥밥 먹으며 함께 일하던 모사 허유(許攸)의 몸통과 분리시킨 모가지를 조조에게 바치며 죄를 청한 게 서기203년(단기2536년, 중국 漢헌제 건안8년, 신라 내해이사금8년, 고구려 산상왕7년, 백제 초고왕38년)이다. 한솥밥을 먹으며 그것도 일가(一家)인 허저가 허유의 목을 친 사연은 이랬다.

 

미리 밝혔지만 원래 허유는 어릴 때 조조와 동문수학을 한 이를테면 불알 친구였다. 장성하며 각기 다른 길을 찾은 허유는 원소 수하의 모사(謀士)로 일하고 있었는데, 원소의 참모끼리 일어난 불협화음과 세력다툼에서 밀려난 허유는 원소의 품을 도망쳐 나와 옛 친구인 조조를 찾게 되었고, 허유의 망명을 받아들인 조조는 얼마 후, 결국 당시로는 조조 자신의 가장 큰 목표였던 기주성(冀州城:원소의 본거지)을 허유의 계략으로 함락시키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기주성을 함락시키든 그날, 신바람이 난 허유는 조조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마상에서 성문을 가리키며 일갈하기를“아만(阿瞞)아 !내가 아니면 네 어찌 이 문으로 들어가겠는가?”라며 조조의 아명(兒名)을 부르며 야자를 텄다. 한마디로 얼마나 오만하고 건방진 행동인가. 조조 수하의 참모와 장수들이 분노하였지만 감히 어떤 자가 상전의 불알친구를 건드릴 수 있으랴. 이는 철없는 허유가 자신의 조그만 공을 지나치게 부풀려 오만방자했던 행동이다.

 

허유의 기세 등등, 오두방정, 천방지축 하는 행동이 그쯤 했으면 좋으련만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자신의 공로를 생색내며 휘하 참모와 장수들을 제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질 않던 어느 날, 범 같은 장수 허저와 성문 앞에서 맞닥트렸다. 뭐, 그냥 지나쳤으면 몸통과 모가지가 분리되는 불상사는 아니 일어났을 터인데, 허저를 보는 순간 또 그놈의 공치사가 발동을 하여 허저를 향해 주둥이 놀리기를“야~! 이놈 허저야! 네 아무리 용맹하다 하나 내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이 기주성을 네 놈 따위가 횡행(橫行)할 수 있으랴!?”분노한 허저는 단 한미디도 없이 당장 그 자리에서 허유를 요절내어 몸과 목을 따로 국밥 만든 것이니, 헛 주둥이 놀리기와 공치사 몇 차례에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관도대전(官渡之戰)은 전사에 길이 남은 전쟁으로 조조와 원소 양웅의 죽느냐 사느냐 앞날이 갈리는 전쟁이었다. 기주성(冀州城)은 원소의 최고 최대의 아지트였다. 원소가 기주성을 본거(本據)로 하여 세력을 펼칠 때 조조마저도 감히 대적하기 힘들어 할 만큼 위세가 대단했었다. 그런 기주성을 빼앗기고 원소는 서서히 침몰했던 것이다. 그런 기주성을 허유의 계략으로 빼앗았으니 허유의 공치사와 오만함이 드러났고 드디어는 주군까지도 우습게 볼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가 결국 참사를 당한 것이다. 아무리 공이 컸어도 오두방정 천방지축 날뛰는 게 아니었다.

 

사례2):

진평(陳平), 초한쟁패 시대의 인물이다. 처음에는 항우를 따랐으나 후에 유방을 섬겨 한나라 통일에 공을 세웠고, 좌승상이 되어 여씨의 난 때에 주발(周勃)과 함께 이를 평정한 후 문제를 옹립하였다. 본문의 허유(許悠)도 그러하지만, 인재(人才)들은 가끔 자신이 섬길 군주를 골라가며 섬기는 경우가 있다. 혹자는 이런 부류의 인재를‘철새 정치인’이라며 참혹한 비판을 하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가령 그릇에 비해 충분한 대접을 하지 않았거나 그 보다는 박대(薄待)를 했거나 아니면 정치적 이념. 사상. 신념. 소신이 달랐거나.

 

위에 밝혔지만 진평은 원래 항우를 섬기는 사람이었고 그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부터 평판이 썩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가령 확인되지 않은 루머였지만 형수와 놀아났다거나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자자했었다. 그런데 이런 평판이 좋지 않은 인물을 유방에게 천거를 한 사람이 위무지(魏無知)라는 인물이었다.

 

유방이나 대소신료들이 인사수석의 보고에 따라 진평의 인간됨을 알고 오히려 천거한 위무지를 크게 꾸짖자“신이 말씀드리는 것은 그의 능력이고, 폐하께서 묻고 있는 것은 그의 행실입니다. 지금 미생(尾生)이나 효기(孝己)의 덕행이 있더라도 숭부의 전략에는 이로울 곳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무슨 겨를에 그런 자들을 등용하겠습니까? 초와 한이 서로 대적하고 있어서, 재주 있는 자를 천거하였는데, 그의 계책이 실로 국가를 이롭게 하는데 족한가를 살필 뿐이지, 어째서 형수와 사통하고 뇌물을 받은 것을 의심하십니까?”였다. 물론 유방은 당장 그를 등용시켰고 얼마지 않아 초한쟁패는 끝이 나며 한(漢)이라는 400년 왕조의 대업을 이룬 것이다.

 

신지호 “마크롱의 길? 윤석열은 도떼기시장에 가야 한다”

https://www.chosun.com/weekly/politics/2021/05/09/D4VEPWQJ5ZC5XEX6STE7EZ5R6E/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허유는 원소의 사람이었지만 원소가 자신을 보듬어 담을 그릇이 못되는 것을 알고 조조의 진영으로 달려간다. 허유가 없었다면 조조가 원소의 본거지 기주성을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공로는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인간이 너무 가볍게 처신을 한다. 자신의 공로를 너무 앞세우고 생색을 냈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럴지라도 조조는 역시 간웅이다. 허유의 목을 직접 자르진 않았지만 허저를 앞세워 눈엣가시를 없애버린 것이다. 이런 경우 토사구팽은 아니다. 팽(烹)의 본질은 가해자가 실컷 이용해 먹다가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자신이 워낙 기고만장(氣高萬丈)날뛰다 일을 당한 것이다.

 

이 고사를 국힘당과 김종인에 대입시키면 딱 어울리는 대목이다. 그러나 김종인이 기고만장 했다면 국힘당은 조조(허저) 만큼이나 오만불손했던 것이다. 좀 기고만장 했더라도 다음 대선까지 모시고 나갔어야 한다. 4.7보궐선거 승리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가 기고만장했기로 그것 하나 못 참으면서 어떻게 큰일을 도모하겠는가?

 

위무자를 보자. 초한쟁패의 종지부를 찍을 만큼 공을 세운 진평이 유방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청문회 과정에서 퇴짜를 맞을 위기에 이르자“그이 능력을 사자는 것이지 그의 행실이 아니다”라고 간절히 아뢴 것이다.

 

오만불손한 국힘당도 문제고 기고만장했던 김종인도 문제지만, 정권탈환이라는 시대적 명제 앞에는 조금씩 양보해야 한다. 도대체가 인물도 구심점도 없는 국힘당이 오만불손만 하다면 종권탈환은 물건너 간다. 미워도 다시 한 번…. 김종인에게 칼자룰 맡기고 윤석열을 초치하는 길을 열어야 한다. 그게 보기도 좋고 윤석열도 국힘당에 합류하는 명분도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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