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金時習):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 생몰: 1435~1493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설잠’이라는 법명으로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고 한다. 방랑 생활을 하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1456년 성삼문이 극형에 처해졌을 때 한밤 중에 시체를 수습해 몰래 서울 아차고개 남쪽에 묻고 장사지냈다고 한다. 뒷날의 얘기고…
매월당 김시습이 일곱 살이 되는 해에 중국에서 사신이 와서 조정 백관이 모두 걱정하고 있는데 김시습이 꾀가 있음을 아뢰었다. 왕의 윤허를 받고 김시습이 압록강에서 사신을 맞았는데, 중국 사신은 아이가 글을 알까 싶어, 버드나무가지로 말채찍을 만들어 ‘마득천리편(馬得千里鞭, 말이 천리마의 채찍을 얻었다)’이라 썼다. 그러자 김시습은 ‘앵실일지춘(鶯失一枝春, 꾀꼬리가 나뭇가지의 봄을 잃었다)’이라 답하였다. 김시습은 돈이 없어 글을 배우지는 못하고 멀리서 구경만 했다고 하니 사신이 조선 사람들의 학식을 두려워했다. 사신이 다시 도화낙지불토닥(桃花落地不토닥, 복숭아 꽃이 떨어져도 토닥 소리 나지 않는다) 하니 김시습이 또한 영월수침무담방(影月水沈無담방, 달빛은 물에 잠겨도 담방소리 나지 않는다) 하니 사신이 두려워하여 그대로 돌아갔다.
외교를 마친 일인지? 아니면..암튼 어떤 일로 세종은 비단 50필을 일곱 살의 김시습에게 상으로 주었는데 이 비단을 모두 홀로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였다. 과연 이걸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궁금했던 모양인데 ‘별 거 아닌 거’라는 투로 즉석에서 비단을 서로 묶어서 엄청 길게 하고는 그냥 질질 끌면서 가버렸다고 한다.
감라(甘羅):
진(秦)나라에서 승상을 지낸 감무(甘茂)의 손자다. 진나라가 천하통일 하기 얼마 전, 전국시대 합종연횡 할 당시의 인물이다. 외교적인 문제로 조(趙)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려 했으나 전쟁 중이라 선뜻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어떤 자가 반열 속에서 자신이 가겠다고 자청하는데 모두 돌아보니 앳된 아이다. 문무 대신들은 기가 막혀 어린놈이 나설 곳이 못 된다고 하자“항탁은 일곱 살 때 공자의 선생이었다.”며 당차게 얘기하는 지라, 그 아이의 의기가 가상하다며 파견했다. 물론 조나라에 파견된 그는 거뜬히 임무를 수행하고 조나라가 점령했던 진나라의 5개 성(城)까지 반환 받은 뒤 무사히 귀국하여 재상의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의 나이 12세 때다.
장유유서 깬 이준석… 아버지뻘 文 영수회담, 宋 카운터파트
https://www.chosun.com/politics/2021/06/11/TP4KBAIJXBHX5LEPB34Z3GMJTY/
천재는 하늘이 내린다. 김시습도 감라도 그리고 이준석도…난 이번 대표 싸움에서 이준석이 승리한 가장 큰 원동력은 그의 현란한 말솜씨에 있다고 본다. 언쟁이 되었든 언변이 되었든 이준석의 말솜씨는 현하(懸河)같은 웅변이다. 그의 말솜씨와 맞붙어 이긴 자를 못 봤다. 그렇다면 그의 말솜씨가 입에서만 나온 것일까? 그렇다고 대답하는 인간은 뇌가 없는 자들이다. 그의 말솜씨 저변에는 삼라만상을 꿰뚫은 박식함이 묻어 있다.
자! 이제 우리는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 보자. 삽살개와 이준석과 대면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역시 송영길과 이준서이 대면하는 광경을… 이것은 단순 비교가 아니다. 12살의 감라가 적국 조나라 조정의 문무백관을 앞에 두고 외교전을 펼쳤을 것을 상상해 보자. 오죽했으면 점령한 땅을 돌려주었겠는가? 이어 일곱 살의 김시습이 일국의 왕 앞에서 펼쳤을 문답을 상상해 보자.
이준석이 삽살개나 송영길 앞에서 삼라만상을 꿰뚫은 학식을 바탕으로 현하 같은 웅변을 펼친다면…??? 상상만 해도 기분 좋지 않은가?
그래서 하는 얘기다. 젊다고 어리다고…자꾸 나이 처먹은 걸 자랑하며 개gr들 하지 말고 일단 한 번 믿고 밀어 보자. 차기 대선의 후보가 결정 되면 그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 갈 것이다. 큰 영향력을 행세하려들지도 또 그렇게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