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일기: 서x식 선생님을 위한 산골일기

아래 산골일기는 갑자기 이아침 만든 것입니다. 어제 제가“산골일기: 한(恨)많은 옥수수”라는 대목을 글을 올린 것을 보신“서x식 선생님”의 댓글이 저로 하여 아래의 글을 다시 찾아내게 한 것입니다. 그 분께서 제게 단 댓글이….

 

<<<오박사님 청년시절을 듣고 나니 가족사가 흡사 저희 집 내력하고 너무 닮았네요. 조모님의 며느리에게 별난 모습이 꼭 저의 어머님이 저의 집사람에게 하신 시집살이와 꼭 같습니다. 그렇게 별난 시어머니를 4개월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벽에 싸 붙인 대소변을 아들인 저에게 한 번도 시키지 않고 했으니 집사람 볼 때마다 미안하고 고맙기가 한량이 없습니다.>>>

 

 

산골일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숙영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숙영아! 내가 이러다간 속병이 나거나 너를 아주 미운 아이로 보고 말 것 같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닥쳐올 불행의 전조이고 가족(家族)이라는 울타리가 무너지는 순간이 될 것 같아 더는 참을 수가 없구나. 이러는 나를 보고 네 어미는‘제발!’이라는 절박한(?)단어를 써가며‘참아라!’라고 종용을 한다만, 그렇게 했다간 정말 내가 위에서 얘기했던 불상사가 일어날 것이기에 이 글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가끔은 네가 이곳에 들어와 이 시아비의 글을 본다기에 볼 것이라는 가정 하에 쓰는 것이다. 만약 보지 못하거나 안 했다면 따로이 네게 이 글을 읽어보라며 전화를 할 것이다. 각설하고…

 

이 글을 계속 이어나가기에 앞서 네 남편이라는 놈 현섭이부터 호되게 꾸짖고 싶구나. 놈을 꾸짖기 전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려면 이야기 한 토막부터 들려주어야겠다. 이 아비가 네 어미와 결혼하고 가장 잘 한 일은 가족(家族)화목을 제일 큰 역점으로 둔 것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수식어 따위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던 결혼 첫 해 약40년 전의 추석날이었다.

 

차례를 끝낸 뒤 대소가와 친인척이 하루 종일 다녀가고 어스름한 저녁이 찾아 왔단다. 갓 시집온 새색시인 네 어미의 앞치마와 손은 마를 시간이 없었단다. 즉 거의 파김치가 될 즈음이었지만 시집 안 간 너의 시고모 둘(둘 다 서열상 손아래 시누지만 큰고모는 네 어미보다 두 살 위고, 작은 고모는 한 살 아래.)은 단 한 번도 주방을 드나드는 걸 보지 못했다. 그런데 대충 열 시가 넘은 그 시각에 두 년의 방 쪽에서 네 어미를 부르는 소리가 났던 것이다.“언니! 언니! 우리 부침개 좀 갖다 줘요!”그러자 네 어미는 피곤한 몸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렇지 않아도 안쓰러운 참인데 마지못해 부스럭 거리며 일어나는 네 어미의 모습에 나는 반은 돌아 버렸단다. 물론 그 상황을 일부러 지켜 본 것은 아니지만 이 아비 눈에 그렇게 비쳐졌다면 그것은 따져 볼 것도 없는 사실이었고 그런 사실을 인지한 이 아비의 눈에 분노의 활화산이 이글거리며 네 시고모들의 방으로 달려갔다. 발길이고 주먹이고 머리끄덩이를 잡고 불문곡직 두 년을 진짜 눈탱이가 밤탱이 되도록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물론“이 개만도 못한 년들아! 니 년들 눙까리엔 언니가 하루 종일 뭘 하고 있었는지 보이지도 않더냐? 부침개가 천만리 머나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손모가지만 뻗으면 닿을 곳에….”그 일로 큰 고모는 사흘(당시 재무부 공무원)을 출근을 못했단다.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고 날벼락이 난 것이지. 그런데 너는 뵙지도 못한 네 시조부님 반응이 어땠을 것 같으니? 명색 그래도 유가(儒家)의 집안이었다. 제 마누라 때문에 시집 안 간 제 여동생을 팼다면 당시로서는 임진왜란이나 625는 난리 축에도 못 끼는 난리가 났을 것이나 내 아버지 어머니는 나의 패륜적(?)행동을 잘 했다고 하시지 않았지만 크게 나무라지도 않으셨단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내가 갑자기 그런 패륜 행위를 한 것에는 내 어머니가 내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야말로‘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 셋’과 함께 지독한 시집살이를 하는 것을 목격하며 자랐고, 그런 지독한 시집살이를 치루는 내 어머니를 방치한 우유부단하셨던 아버지에 대한 좋지 않은 추억들이 고스란히 밴 행동이었던 것이다. 당신의 아내(설령 썩 사랑하지 않더라도 한 개인의 인격을 무시하는 시집살이)를 어떻게 그런 식으로 내 몰수 있을까? 나는 늘 그런 게 불만이었던 것이다. 많은 가장들이 그렇게 참고 견디는 것이 가정의 화목으로 착각을 한다만, 화목은커녕 앙앙불락 하다가 가정이 깨지는 경우가 어디 한둘 이겠느냐?

 

네가 우리 집으로 시집오기 전 가끔 목격 했을 것이다마는, 식사 후 나 자신이 스스럼없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한다든가 어떤 경우 조리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 자연스런 행동을 너만 본 것이 아니다. 네 손위 시누이들이 시집가기 전 드나들었던 예솔이 고모부들 즉‘강서방과 박서방’도 그런 모습을 자주 목격한 뒤 오가 문으로 장가를 온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너나 고모부들에게 일부러 연출한 행동은 아니란다. 그런 것들을 목격한 지금은 어떠니? 네 남편 현섭이도 강서방과 박서방도 주방에 드나들기를 자연스럽게 하지 않더냐? 이른바 몸으로 학습을 시키기 위한 이 아비의 묵언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그 가르침을 네 남편이나 고모부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결과가 오늘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색을 내고자 함이 아니고 너의 시누이 둘이 너에게 티끌만큼이라도 시누이 노릇하는 걸 본 적이 있느냐? 혹시라도 이 아비가 보지 않는 보지 못한 대목에서 만약 그랬다면 그 년들은 반은 초주검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아비는 가정의 가족의 민주화를 진즉 이룬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터이기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얘기가 너무 긴 것 같아 오늘은 여기서 그치자.

 

BY SS8000 ON 7. 23, 2014(아무래도 안 되겠다 숙영아! 에서…)

 

 

뒷 담화:

저의 부친께서 근동에 없는 효자로 소문이 나셨습니다. 어린 제가 보더라도 정말 조부모님 앞에서 촌치도 흐트러짐 없이 생활 하시는 걸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부모 특히 제 할머니와 고모들이 어머니께 하는 제 나름의 부당한 행위들에 대해선 단 한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저는 그게 어릴 때부터 열불이 나고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짐을 했습니다. 내가 만약 저런 경우에 닥치면 나는 결단코… 그날 그 추석날 제 여동생 둘이 딱 걸린 겁니다. 효도가 먼저냐 아내의 부당함 아내로서의 여권이 먼저냐는, 어떤 게 우선인지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전개되는 부당한 사실에 눈을 감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 어떤 것이 공정. 정의. 평등인지 우리 모두가 곰곰이 따져 볼 일입니다. 공정. 정의. 평등은 부당한 것들이 먼저 선결 되어야만 주장하고 표출 되는 것들입니다.

 

제 아버지는 아무리 효자이셨더라도 효자라는 이름 아래 그런 것들을 모른 채 하시거나 아예 눈을 감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부당함을 제가 온 몸으로 알려 드렸으니 아버지도 하실 말씀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아이고! 제가 많이 흥분했나 봅니다. 서 선생님! 그 때 못 다한 사랑 지금이라도 많이 갚아 드리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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