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으로 어머니는 왼쪽 팔, 형님 역시 왼쪽다리를 대퇴부까지 잃으셨다. 팔 하나 없으신 어머니는 농사일을 제대로 하실 리가 없었다. 그로 인해 할머니로부터 냉대와 함께 구박이 자심했었다. 내가 철이 들 즈음 할머니는 중풍으로 환중이셨다. 그렇게7년여를 병석에 누워 계셨지만 모든 병구완은 팔 하나 없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랬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내가 초등학교3학년 때였다. 사실 죽음에 대한 정의도 확실치 않은 그날 저녁 염으로 쌓인 할머니의 주검 앞에서 슬픔 같은 건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순서에 의해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할머니의 관 앞에는 낯선 두 사람의 여인네가 있었던 걸 기억한다. 그들은 상여가 나가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밤낮으로 구슬프게 울어 제꼈다. 그녀들의 그 구슬픔 때문에 라도 주위의 문상객들의 목소리까지 슬픔으로 변한듯했다.
그런데 어린 나였지만 그녀들의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을 간간이 보았다. 애간장이 타듯 구슬프게 울다가도 막걸리 한 잔씩 들이키며 깔깔거리기도 다른 문상객들과 농담하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감추고 말고도 없이 스스럼없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에 의아해 했던 것이다. 그렇게 구슬프게 울다가 다시 깔깔거리며 웃기까지…??? 당시로서는 이해불가였다.
내가 그녀들의 정체를 짐작하게 된 것은 고등학생이 되고서 였다. 어느 부분에선가 곡비(哭婢: 장례 때 의도적으로 곡을 하는 종이지만, 요즘으로 치면 곡을 알바로 하는 직업)라는 단어를 배우면서 그녀들이 할머니 장례식에 고용된 곡비(哭婢)였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다.
글쎄다, 지금 돌아가신 어머니의 심정을 알 턱은 없지만, 당시 할머니의 모진 구박 속에7년이상을 병구완하셨다면 솔직하게 울음과 눈물인들 제대로 났겠는가? 순전히 내 개인 생각이지만 할머니의 죽음 앞에 구슬프게 울어가며 애도할 만큼 효부는 아니셨기에 아마도 어른들께서 곡비를 고용 하셨을 거라 짐작이 간다. 아니면 당시의 사회 정서나 장례문화가 그러했거나….(하략)
BY SS8000 ON 1. 11, 2013 (곡비(哭婢)와 좀비에서…..)
성남서 ‘눈물 유세’한 李, ‘울지마 이재명’ 사진 올린 與
https://www.chosun.com/politics/politics_general/2022/01/24/IKJSIQ3TPRDN3PPAAEQB6PVHKI/
곡비(哭婢), 그녀들이 그랬다. 그렇게 구슬프게 울다가 다시 깔깔거리며 웃다가 다시 떠…그렇게 밥복을 했다. 自點이 저놈의 유세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뻑 하면 포복절도(抱腹絶倒)절도를 하며 깔깔거리며 웃다가 어느 순간엔 또 저렇게 구슬피 울면 민심을 호도하는 것이다.
미친늠! 첨부터 곡비를 하거나 아니면 신파극(新派劇) 3류 딴따라나 할 것이지…..
대통령?? 저렇게 유약(幼弱)하고 찌질한 새끼가 만에 하나라도 대통령이 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땅에 떨어진 국격이나 국민의 자존심은 어디서 찾고 세울 것인가? 지금 우리 국민은 못 입어서도 배고파서가 아니다. 나라의 진정한 가치와 국민의 자존심을 세워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런 찌질한 병신 새끼를 극구(極口)반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