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어진 野…유튜브엔 빵 든 尹합성사진 걸고 “빵셔틀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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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바로 저런 따위의 개수작(빨갱이들의..)이 벌어질 게 저어되어 개인적으로 가장 바라고 소원했던, 그야말로 시시각각 TV나 인터넷에 보도되는 한일 정상회담을 아예 보지 않았다. ‘무슨 썰이라도 풀어야지…이번 회담 결과에 대해 어떤 견해라도 내 봐야지…’하는 게 개인적 희망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침에 일어나 인터넷 신문을 먼저 뒤진 결론이다.
무슨 썰부터 먼저 풀까? 그리고 제목부터 생각해 보았다. 개수작질 하는 빨갱이들의 한일 정상회담 폄훼발언 주둥아리 놀림이“빵셔틀 외교”란다. 학교폭력 피해자에 빗댄 “빵 셔틀”을 아는 이들은 특히 낫살이나 먹은 양반들은 잘 모르실 것이다. 왕따 시키는 아이에게 현금갈취는 물론이고 매점에 있는 빵이나 라면 심부름까지 시키는 것을 두고‘빵셔틀’이라고 하는 것이다. 빵셔틀, 어디 폭력학생의 가해자 피해자에만 적용되는 단어일까? 이런 악습은 선후배 간 또는 고참과 신참 간 넓게는 이 사회 전반에 걸쳐 행해지는 악습(惡習)인 것이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는 빵이 되었든 라면이 되었든 셔틀버스 운행은 가해자의 폭력이나 폭압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지 피해자 스스로 알아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는 없는 것이다. 내 말은 빨갱이들의 비유 자체가 틀려 처먹었다는 것이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시작도 끝도 주인공은 우리의 윤석열 대통령이다. 경직된 한일 관계를 풀기 위해 웜업을 시도한 것 즉 회담을 개시한 것도 윤 대통령이고 빨갱이들 표현대로 빵를 사러 일본으로‘빵셔틀’을 시도 한 것도 윤 대통령 스스로 한일회담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윤석열 이름 세 자다.
왜 그랬을까? 한국과 일본 지구촌 유일의 앙숙이 아닐까? 오죽하면 가위바위보도 져서는 안 된다는 게 이 땅의 빨갱이들이다. 가위바위보 이기면 일본보다 국력도 경제력도 아니 양국 국민의 국민 정서가 우위에 올라서고 쾌감을 느끼나? 못난 빨갱이들.
썰의 서두가 몹시 장황했지만, 나는 평소 소신이 진정한 승자는 용서하는 자 그리고 그 용서 속에 화해를 하는 것 다시 그 화해를 발판으로 양보하는 쪽이 진정한 승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 ‘썰’의 제목을“용서와 화해 그리고 양보”라고 지었고 할 말이 많은 관계로 1.2부로 나누어 썰을 풀려는 것이다.
썰을 풀어 나가기 앞서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애국열사를 한 분 소개해야 겠다. 굳이 애국열사라고 칭하는 것은 그 분의 죽음은 빨갱이들의 만행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명: 손양원
출생:1902. 6. 3. 경상남도 함안
사망:1950. 9. 28.
가족:배우자, 슬하 5남 3녀
학력:평양신학교
경력:
1946~1950.09 애양원교회 목회 목사
1945.08~1946 애양원교회 목회 전도사
1939.07~1940.09 애양원교회 목회 전도사
때는 아직도 보수와 빨갱이 사이에 풀리지 않은 숙제, 제주 4.3 사태에서 시발점이 된“여순반란사태”때의 일이다.
여순반란사태 당시 빨갱이들에게 체포된 어린 두 학생이 있었다. 체포된 명목이 단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인민재판이 열렸고 빨갱이 인민재판장은“예수를 믿어? 그럼 어디 믿어서 잘 사나 보자. 사형에 처한다”이 한마디가 울려 퍼지고 어린 두 학생은 총살당했다. 하지만 총살당하면서도 그들의 눈빛은 살아있었다.
사실 어린 두 학생이 총살을 당하게 동기는 이랬다. 대한민국은 광복 이후 좌익과 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형국에 빠져들며 유혈 사태가 잇따랐다. 1948년, 매우 뜨거운 해였다. 전남 순천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해 10월, 여수와 순천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은 제주도 4.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순천에는 전국학생연맹에서 활동하고 있던 손동인, 손동신 형제가 있었다. 반란군 세력은 두 학생이 우익 성격을 띠는 단체에 소속됐다는 이유를 빌미로 둘을 체포, 사형을 집행했다. 그들 형제가 죽고 난 4일 뒤, 가족들이 두 형제의 죽음을 알게 됐다. 온 가족은 대성통곡하면서 분노를 참지 못했다. 두 형제의 죽음을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았다.
이후 정세가 뒤바뀌었다. 반란군이 진압됐고, 국군 계엄사령부는 반란을 주도한 자들을 체포해 처단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손동인, 손동신 형제를 체포, 살해한 범인인 안재선도 처벌을 받게 됐다. 사형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두 형제의 아버지는 “그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며 안재선을 찾아가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너의 과거 죄는 기억 안 할 테니, 하나님 앞에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를 믿어 훌륭한 일꾼이 되어다오. 내 죽은 두 아들이 할 일을 네가 대신해야 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친아들 둘을 죽인 살인범을 양아들로 삼았다. “원수를 사랑하라”를 몸으로 실천한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다.
손양원 목사는 원수인 안재선을 용서하고 사랑했다.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재선은 감사함, 미안함, 죄송함 등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눈물을 펑펑 쏟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아무리 신앙심이 깊고 마음이 따뜻하고 너그럽다고 한들, 친아들을 죽인 원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용서할 수 있을까?
후일의 얘기지만, 손양원 목사도 힘들었다. “사랑하는 두 아들이 앉았던 식탁에 살인범을 앉히고 밥을 먹을 때, 입안에는 밥이 아닌 모래알이 삼켜진 듯했다”고 소리직한 심정을 고백했다. 하지만 결국 살인범을 용서했다. 안재선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진심으로 손양원 목사를 아버지로 따랐다. 그가 보여준 놀라운 행동으로 현재까지 진정한 종교인의 귀감으로 여겨지며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칭까지 생겨났다.
그리고 뒷날 손양원 목사의 얘기는‘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아들들의 원수를 용서한 손양원 목사는 그 후 원수 놈들의 땅 전남 여수에 있는 애양원에서 평생 문둥병(한센)환자들을 위해 봉사 활동을 했다.
그랬던 손양원 목사는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일 지리산의 빨치산 잔당들에게 피살 당했던 것이다. 결국 빨갱이를 용서했지만 용서한 그 빨갱이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이로서 오늘 썰을 마치겠지만, 마지막 한마디로 매조지 하라면, 빨갱이들 사전에 없는 단어가 바로 “용서. 화해 그리고 양보”가 없는 것이다.
사족:
먹고 입을 것이 귀하다 해서 마음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
음식 잘 먹는 것보다 마음 잘 먹는 것이 낫고,
의복으로 단장하는 것보다 선행을 옷 입듯이 살아가라.
물질이 궁핍하면 도를 통한 이치를 깨닫게 되고,
반대로 배부르고 따뜻하고 평안하면 음란죄가 나타난다.
– 손양원 목사 옥중서신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