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화해 그리고 양보(1부)

거칠어진 野…유튜브엔 빵 든 尹합성사진 걸고 빵셔틀 외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60835

 

어제는 바로 저런 따위의 개수작(빨갱이들의..)이 벌어질 게 저어되어 개인적으로 가장 바라고 소원했던그야말로 시시각각 TV나 인터넷에 보도되는 한일 정상회담을 아예 보지 않았다. ‘무슨 썰이라도 풀어야지이번 회담 결과에 대해 어떤 견해라도 내 봐야지…’하는 게 개인적 희망이기도 했다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아침에 일어나 인터넷 신문을 먼저 뒤진 결론이다.

무슨 썰부터 먼저 풀까그리고 제목부터 생각해 보았다개수작질 하는 빨갱이들의 한일 정상회담 폄훼발언 주둥아리 놀림이빵셔틀 외교란다학교폭력 피해자에 빗댄 빵 셔틀을 아는 이들은 특히 낫살이나 먹은 양반들은 잘 모르실 것이다왕따 시키는 아이에게 현금갈취는 물론이고 매점에 있는 빵이나 라면 심부름까지 시키는 것을 두고빵셔틀이라고 하는 것이다빵셔틀어디 폭력학생의 가해자 피해자에만 적용되는 단어일까이런 악습은 선후배 간 또는 고참과 신참 간 넓게는 이 사회 전반에 걸쳐 행해지는 악습(惡習)인 것이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는 빵이 되었든 라면이 되었든 셔틀버스 운행은 가해자의 폭력이나 폭압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지 피해자 스스로 알아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는 없는 것이다내 말은 빨갱이들의 비유 자체가 틀려 처먹었다는 것이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시작도 끝도 주인공은 우리의 윤석열 대통령이다경직된 한일 관계를 풀기 위해 웜업을 시도한 것 즉 회담을 개시한 것도 윤 대통령이고 빨갱이들 표현대로 빵를 사러 일본으로빵셔틀을 시도 한 것도 윤 대통령 스스로 한일회담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윤석열 이름 세 자다.

왜 그랬을까한국과 일본 지구촌 유일의 앙숙이 아닐까오죽하면 가위바위보도 져서는 안 된다는 게 이 땅의 빨갱이들이다가위바위보 이기면 일본보다 국력도 경제력도 아니 양국 국민의 국민 정서가 우위에 올라서고 쾌감을 느끼나못난 빨갱이들.

썰의 서두가 몹시 장황했지만나는 평소 소신이 진정한 승자는 용서하는 자 그리고 그 용서 속에 화해를 하는 것 다시 그 화해를 발판으로 양보하는 쪽이 진정한 승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 의 제목을용서와 화해 그리고 양보라고 지었고 할 말이 많은 관계로 1.2부로 나누어 썰을 풀려는 것이다.

썰을 풀어 나가기 앞서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애국열사를 한 분 소개해야 겠다굳이 애국열사라고 칭하는 것은 그 분의 죽음은 빨갱이들의 만행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명손양원

출생:1902. 6. 3. 경상남도 함안

사망:1950. 9. 28.

가족:배우자슬하 5남 3

학력:평양신학교

경력:

1946~1950.09 애양원교회 목회 목사

1945.08~1946 애양원교회 목회 전도사

1939.07~1940.09 애양원교회 목회 전도사

때는 아직도 보수와 빨갱이 사이에 풀리지 않은 숙제제주 4.3 사태에서 시발점이 된여순반란사태때의 일이다.

여순반란사태 당시 빨갱이들에게 체포된 어린 두 학생이 있었다체포된 명목이 단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다그리고 소위 인민재판이 열렸고 빨갱이 인민재판장은예수를 믿어그럼 어디 믿어서 잘 사나 보자사형에 처한다이 한마디가 울려 퍼지고 어린 두 학생은 총살당했다하지만 총살당하면서도 그들의 눈빛은 살아있었다.

사실 어린 두 학생이 총살을 당하게 동기는 이랬다대한민국은 광복 이후 좌익과 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형국에 빠져들며 유혈 사태가 잇따랐다. 1948매우 뜨거운 해였다전남 순천도 마찬가지였다같은 해 10여수와 순천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은 제주도 4.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순천에는 전국학생연맹에서 활동하고 있던 손동인손동신 형제가 있었다반란군 세력은 두 학생이 우익 성격을 띠는 단체에 소속됐다는 이유를 빌미로 둘을 체포사형을 집행했다그들 형제가 죽고 난 4일 뒤가족들이 두 형제의 죽음을 알게 됐다온 가족은 대성통곡하면서 분노를 참지 못했다두 형제의 죽음을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았다.

이후 정세가 뒤바뀌었다반란군이 진압됐고국군 계엄사령부는 반란을 주도한 자들을 체포해 처단하기 시작했다이 과정에서 손동인손동신 형제를 체포살해한 범인인 안재선도 처벌을 받게 됐다사형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두 형제의 아버지는 그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며 안재선을 찾아가 손을 잡았다그리고 말했다.“너의 과거 죄는 기억 안 할 테니하나님 앞에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를 믿어 훌륭한 일꾼이 되어다오내 죽은 두 아들이 할 일을 네가 대신해야 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친아들 둘을 죽인 살인범을 양아들로 삼았다. “원수를 사랑하라를 몸으로 실천한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다.

손양원 목사는 원수인 안재선을 용서하고 사랑했다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안재선은 감사함미안함죄송함 등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눈물을 펑펑 쏟을 뿐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사실 아무리 신앙심이 깊고 마음이 따뜻하고 너그럽다고 한들친아들을 죽인 원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용서할 수 있을까?

후일의 얘기지만손양원 목사도 힘들었다. “사랑하는 두 아들이 앉았던 식탁에 살인범을 앉히고 밥을 먹을 때입안에는 밥이 아닌 모래알이 삼켜진 듯했다고 소리직한 심정을 고백했다하지만 결국 살인범을 용서했다안재선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진심으로 손양원 목사를 아버지로 따랐다그가 보여준 놀라운 행동으로 현재까지 진정한 종교인의 귀감으로 여겨지며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칭까지 생겨났다.

그리고 뒷날 손양원 목사의 얘기는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아들들의 원수를 용서한 손양원 목사는 그 후 원수 놈들의 땅 전남 여수에 있는 애양원에서 평생 문둥병(한센)환자들을 위해 봉사 활동을 했다.

그랬던 손양원 목사는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일 지리산의 빨치산 잔당들에게 피살 당했던 것이다결국 빨갱이를 용서했지만 용서한 그 빨갱이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이로서 오늘 썰을 마치겠지만마지막 한마디로 매조지 하라면빨갱이들 사전에 없는 단어가 바로 용서화해 그리고 양보가 없는 것이다.

사족:

먹고 입을 것이 귀하다 해서 마음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

음식 잘 먹는 것보다 마음 잘 먹는 것이 낫고,

의복으로 단장하는 것보다 선행을 옷 입듯이 살아가라.

물질이 궁핍하면 도를 통한 이치를 깨닫게 되고,

반대로 배부르고 따뜻하고 평안하면 음란죄가 나타난다.

– 손양원 목사 옥중서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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