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할 줄 아는 자는 용서할 줄도 안다.
이 말을 바꾸어 얘기하면 분노했기 때문에 용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옛 말씀에 이르기를,”책인지심(責人之心)으로 책기(責己)하고 서기지심(恕己之心)으로 서인(恕人)하라”즉,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자신을 꾸짖고,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티끌만큼만 유리(有利)해도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과오나 잘못은 돌이켜 보지 않고 저 자신에게 최대한 관대하고, 타인의 그것에는 추상같은 호령으로 일갈한다. 즉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법이나 양심보다는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것이다. 나라에 지엄한 법이 시퍼렇게 살아있건만, 떼로 몰려다니며 지엄한 법을 고무줄처럼 당겼다 줄였다 저희 편리한 대로 적용시켜 때로는 법이 있는 것인지도 무색할 정도로 떼법을 활용하니 같은 행위나 위법이라도 저희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하면 불륜 법을 적용 시키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아래 얘기는 어디선가 한두 차례 써먹은 얘기다. 세월호 사태가 일어나기 하루 전 중동의 이란에 20대의 한 사형수가 교수대에 매달렸다. 그는 7년 전 시장에서 벌어진 사소한 다툼 끝에 비슷한 나이의 소년을 칼로 찔러 죽였던 것이다. 우리가 쉽게 얘기하는‘눈에는 눈’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에는 ‘키사스(Qisas)’라고,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의미의 징벌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율법 속에는’샤리아’라고 하여 피해자의 가족 중 누군가가 죄인을 처벌할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6년간의 긴 재판 끝에 교수형에 처 해진 청년은 자신의 목에 올가미가 걸쳐지자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때 피해자의 어머니가 교수대로 조용히 다가왔다. 죄인이 버티고선 의자만 걷어차면 형 집행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어머니는 조용히 사형수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따귀를 한 대 올려 부쳤다. 그리고 아들을 찔러 숨지게 한 죄인의 목에 감긴 올가미를 조용히 풀어줬다. 죄를 모두 용서한다는 뜻이었다. 이 장면을 지켜 본 죄인의 어머니와 피해자의 어머니는 흐느끼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즉 통상 공개 처형으로 끝났을 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 부모들의 화해로 마무리됐던 것이다.
용서 없는 화해가 없겠지만 용서할 수 있는 동기를 만들라는 것이다. 분노하고 있는 자만이 용서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분노하지 않는 놈들은 용서의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분노해 보지 않고 어찌 용서를 할 수 있겠는가. 천안함사태. 서해교전. 박왕자씨 사건등등..전시가 아님에도 아군이 죽어가도 유람하는 국민이 맥없이 총탄에 스러져도 분노 해 본 적도 없는 놈이 어찌 용서를 바란다는 말인가? 비단 그 뿐인가? 세월호 사태도 그렇다. 이제 좀 그만들 하자. 유가족의 슬픔을 어찌 일구난설로 표현 하겠는가. 이제 그만하면 세월이 약이 될 만큼 흐른 듯하다. 그들의 슬픔을 반정부 반정권 불쏘시개 삼는 개보다 못한 인간들이 점점 늘어나면 그 슬픔이 퇴색하고 묻히고 마는 것이다. 그만큼 분노 하고 있으면 누군가를 용서할 때도 됐다.
어제 그제 자신의 이들 둘을 살해한 손양원 목사 얘기도 그러했지만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그것도 둘씩이나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은 목사님의 숭고한 정신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 얘기 이란에서 벌어진, 역시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20대의 사형수를 귀싸대기 한 대 올려붙인 것으로 용서해 준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그 분들의 용서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 머리 있는 인간이라면 생각을 해 보자. 용서에 어떻게 조건을 붙인단 말인가? 조건 붙은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그냥 야합(野合)이나 좋게 표현하면 타협(妥協)인 것이다.
용서라는 단어는 지고지순해야 하고 숭고(崇高)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데나 용서라는 단어를 남용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에게 지은 죄는 분명히 있다. 36년 압제라는 씻지 못할 죄. 그러나 그들의 죄는 현실을 살아가는 일본인이 아니다. 그들의 조부 증조부 때 저질러진 잘못이다. 자신들의 자식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지 않든가.
현대를 살아가며 일본인에게 자신의 육친을 가족을 살해당한 사람 있는가? 당신들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당한 일을 아직도 원수를 삼고 해해년년 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사과를 요구하고 보상을 요구한다면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을 바꾸어 조용하고 한가한 일요일 새벽 남침을 하여 우리 국민과 국군 심지어 유엔군 등 수백만을 죽이고 상하게 한 북괴나 중공에게 보상과 사과를 요구해보기는 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 놈들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그 때 먹어치우지 못한 분노를 지금도 삭이지 않고 심지어 중공은 그러한 패악질을 두고 항미원조(抗美援助)라는 이름으로 미화시켜 해해년년 경축식을 하고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북괴와 중공은 용서가 되는데 어째서 100여 년 전의 일본인 조상들의 죄업은 용서가 안 되는 것인가?
이제 그만 잊자. 일본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그리고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용서(容恕)에는 조건이 없어야 한다. 거듭 얘기하지만 조건 붙은 용서의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즉 강요 끝에 이루어지는 사과는 진심일 수가 없다. 그 따위 용서와 사과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매년 매번 똑같은 절차와 요구가 반복되고 결국 한일 관계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 모두가 한일 지도자들의 정치적 계산에 의해 공식처럼 굳어버린 폐해고 패착인 것이다.
그래서 하는 얘기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윤석열 대통령의 조건 없는 용서에서 비롯된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의 답방이다. 이제부터 미래지향의 한일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초석을 잘 쌓아 굳건한 한일 선린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