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조선일보에<이종찬 광복회장 8.15 시론>“해방은 도둑처럼 오지 않았다.”라는 칼럼이 올라왔었다. 아마도 이종찬 광복 회장의 칼럼 며칠 전에 某교수 되는 양반이 광복절 그리고 8.15에 대해 글을 올리며 건국절을 주장했던 모양이다.(사실 이 부분을 읽지 않아 단정할 수 없다.) 그 주장에 대한 일종의 반박을 겸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칼럼이었다.
나는 이 광복회장의 칼럼을 읽으며 내심 속이 부글거렸다. 건국절에 대한 주장은 다양하다. 전임 문재인 같은 자는 1919년을 주장하고 某교수(물론 어릴 때 그렇게 배웠던 나도 동참)는 1948년, 역시 오늘의 비교 인물이신 역사학자 이인호 명예 교수께서도 1948년으로 주장하시는 반면, 이종찬 광복회장 같은 경우“1948년 건국절 주장 용납 못해”라며 아예 선전포고를 하고 있다.
내가 이종찬 광복 회장의 칼럼을 읽으며 부글거렸다는 의미와 느낌은 두 가지로 집약시킬 수 있다. 그의 표현 중에 “”해방 정국을 직접 목격했다고 해서 발언의 특권을 누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그 시대를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하는 선생론(先生論)이었다. 즉 ‘나는 너희 보다 일찍 세상에 나와 그 시절을 겪어 보았으니 그 시절에 태나지 않은 너희들은 개구(開口: 입도 열지 마라)하지 마라’는 식이다. 한마디로 요즘 유행하는‘라떼는 말야~!’하는 식의 꼰대 의식이다.
<<<*첨언 하자면, 이종찬 광복 회장의 선생론을 읽고 다시 이인호 교수님의 반박문을 읽으며 가장 먼저 두 분의 생년을 먼저 비교해 보았다. 후자인 이인호 교수님이 이종찬 광복회장의 선생론 희생자가 아닐까? 하고, 다행히 두 분이 같은 1936년 생이시다.>>>
그러나 모든 역사를 논할 때 이게 얼마나 오만하고 부당하고 역사를 부정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자신이 태나서 겪은 일만 옳고 정확하다면 역사(史)는 없는 것 아닐까? 단군과 삼국과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입에 담고 씨부리 쌌는 역사 선생님 뿐 아니라 그렇게 배우고 알고 지내는 역사 이후의 인간들은 역사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도 못한다는 것인가?
그래서 나는 그게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오늘날‘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그 시대를 함부로 말하는 자칭 지식인이 어디 한둘인가? 아니한 말로 625. 419. 516. 518. 등등 국운이 기울 정도의 대형 사고나 사태 때 고고지성도 안 지른 빨갱이 놈들이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을 폄훼하고 부풀리는 꼬라지는 어째서 두고 보는가? 각설하고..
어째 하다보니 좀 흥분 했다. 나는 솔직히 정말 보다 솔직히 건국절이 어렸을 때 내가 배웠던 1948년이 아니고 1945년으로 해도 상관은 없다. 몇 년 앞서고 뒤선다고 뭐 달라질 게 있는가?
그런데 서로 달리 보는 입장의 인물과 또 그런 주장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그룹이 있기 때문에 오늘의 썰을 풀고자 하는 것이다.
1948년도를 주장하는 某교수와 이인호 교수님은 학자적 주장이다. 학자가 무엇을 하는 직업인지 굳이 설명 않겠다. 무엇이든 연구하고 발표하는 것으로 업(業)을 삼고 또 후학을 가르치고 계도 한다. 이 점은 학문적이고 학술적인 문제다. 학문이나 학술은 이성(理性)적이어야 한다.
이종찬 광복회장의 가문은 새삼 입에 올리지 않아도 명문가임은 틀림없다. 윗 선대이신 우당 이회영 선생께서는 가문의 전 재산 거금을 독립운동의 기초를 다지는데 투자한 것은 분명하다.(난 그 시대에 태나지 않았지만 역사책에서 배웠다.) 그것으로 독립투사를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그분의 공로 은덕을 우리는 기려야 하고 기려 왔다.
그런데 이종찬 광복회장의 느닷없는‘건국론’이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두고 파문과 파장이 일어난 것이다. 솔직히 이번 이종찬 회장의 발언은 광복회라는 이름을 빌려 자신의 가문 역사를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해 보자는 속셈이 아닐까 하는 개인적 느낌이 든다.
결국 이종찬 회장의 건국론은 이성적인 것에 두지 않고 개인의 어쩌면 가문의 영광을 위한 감성(感性)이 더 큰 것 같다.
이회영 선생께서 독립운동의 기초를 다지고 직접 참여한 공은 크다 하겠다. 그런데 어제 전남 광주발 뉴스를 보면, 북한·중공군 행진곡 만든 장본인이자 6‧25 남침 나팔 불던 정율성 기념공원을 48억원을 들여 조성 했다는 것이다.
이회영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는 도중 왜경에 잡혀 옥사를 했다. 문제는 선생이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독립투쟁이 아니라 아나키스트(Anarchist) 즉 무정부주의자 였다는 사실이다. 독립운동가 사이에는 아나키스트들이 제법 있었단다. 그 무정부주의자들이 광복을 맞이하고 거의 공산주의 신봉자로 변했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아나키스라고 해서 무조건 전부 공산주의자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회영 선생이 광복 이전에 돌아가셨으니 그 분의 마지막 선택은 누가 알겠는가?
중언부언 장황했지만, 건국절을 두고 1945년과 1948년을 달리 보는 인물들을 가만히 비교해 보면 분명 한쪽은 좌익사상이 충만한 반면 다른 한쪽은 철저한 보수주의자들이라는 점이다.
미리 밝혔지만 1948년이면 어떻고 1945년이면 어떨까마는 좌우의 시각이 서로 다른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만 개인적인 평을 내린다면 좌우 이념이 다른 정권이 생길 때마다 건국절이 달라지 게 답답하고 서글픈 것이다.
이종찬 광복회장 “1948년 건국절 주장 용납 못해..‘1道 1독립기념관’ 세워 역사 알게 할 것” https://biz.chosun.com/topics/topics_social/2023/08/15/MLMYNFCUZFCNHOJCVWS42XZTR4/
광복회가 무슨 권력기관이 돼서도 안 되지만 알량한 권력을 얻었다고 나라 역사를 좌지우지 하는 발언은 삼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독립기념관은 하나면 족하다. 열 개 백 개 라도 역사를 부정하려는 세력 앞에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