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공신의 종류를 알아보자.
개국공신(開國功臣):명칭 그대로 나라는 세우는데 공이 많은 신하.
정사공신(定社功臣):개국 후에 정사를 정비하고 국가를 안정시키는 데 공을 세운 신하
호성공신(扈聖功臣):피난할 때 호종했던 공신.
선무공신(宣武功臣):전장에서 공을 세웠거나 후방을 지원한 공신
분무공신(奮武功臣):전쟁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전쟁을 도운 공신.
원종공신(元宗功臣):왕이 복위할 때 공을 세운 공신.
정공신(正功臣):왕이 즉위할 때 공을 세운 공신.
친공신(親功臣):즉위한 후에 정사를 정비하고 국가를 발전시키는 데 공을 세운 공신.
이상은 오늘날 국가가 수여하는 훈장과 그 의미나 명예가 비슷하다할 것이다. 다만 훈장 중 최고로 치는 훈장은“무궁화대훈장”인데 이 훈장은 퇴임 대통령이나 우방원수 및 그 배우자에게만 수여 하는 것이라 누구나 대통령이 되면 셀프 훈장이기에 다른 훈장에 비해 질(質)이 좀 떨어진다 하겠다. 결론은 수여 받을 인물이 받으면 되는 데 뇌물을 먹고 발각되자 쪽 팔려 자살하고 죽어도 또 삽살개 같이 여적 죄를 지은 자까지 셀프 수여를 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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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李适) 본관 고성(固城). 자 백규(白圭). 무과에 급제하여 태안군수를 역임하고, 1622년(광해군14)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기 직전, 인조반정에 가담, 작전 지휘를 맡아 반정을 성공하게 했다. 후금(後金)과의 국경 분쟁이 잦자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副元帥)로 영변(寧邊)에 출진, 성책을 쌓고 국경경비에 힘썼다. 1624년(인조2) 아들 전(旃)이 지식층과 사귀다가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한 것이 과장되어, 반역의 무고를 받고 영변의 군영에 금부도사가 당도하자 무능하고 의심 많은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 난을 일으켰다. 1만2000의 군사를 거느리고 탁월한 작전으로 한양으로 진격하자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란하고 이괄은 서울을 점령하고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서울에 입성한지 이틀 뒤 장만(張晩)의 관군에 참패, 이천(利川)으로 도망했으나 부하 장수 기익헌(奇益獻)등에게 목이 잘려 난은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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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에 의하면 이괄은 야망 있는 무인이었고 무인이면서도 문장과 필법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인조반정에 가담한 것도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안 이귀와 김류의 권유 때문이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날 반군은 홍제원에 집결하기로 했는데 대장인 김류가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누군가의 고변으로 국청을 개설하고 반군을 다스린다는 소문에 군사들이 크게 동요하여 지리멸렬하려는 때, 이귀의 부탁으로 김류 대신 대장이되어 군을 정비하고 군기를 확립하여 인조반정을 성공시켰다. 당시 반정에 성공한 이괄은 김류의 우유부단한 행동에 반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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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이 성공한 후 논공행상이 당연히 따를 것이고, 혼돈에 빠진 반정군대장이 되어 수습하는 등 공이 가장 컸음에도 그는 공2등에 제수되고, 그것도 중앙관직이 아닌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국경 변방 지역으로 밀려나자 이에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이 곧‘이괄의 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이괄을 단순한 반역자로 몰았던 위정자들의 조작이라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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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공행상의 자리에서 이귀는 이괄의 공을 알고 인조에게‘어제의 반정은 이괄의 큰 공과 활약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당연히 그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해야 할 줄 압니다.’라고 상신했었지만, 이괄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괄은 말하기를‘신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다만 일을 다 하여 회피하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어제 대장인 김류가 약속시간에 오지 않아 이귀가 신에게 그를 대신하게 하였는데 류가 늦게 왔음으로 그의 목을 베고자 하였으나, 귀가 극력 말려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물론 그 자리엔 김류도 같이 있었음에도 이괄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속마음을 왕에게 솔직히 털어 놓았다. 이괄은 논공과 관직은 둘째 치고 김류의 기회주의적인 자세가 더 불만이었던 것이다. 이 일로 논공행상의 자리는 분위기가 험악해 지고 보이지 않는 심리전이 이괄과 김류사이에 벌어졌던 것이며 김류의 반격에 의해 사건은 꾸며지고 결국 이괄은 다시 반정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한양을 점령하고 인조는 공주까지 피난을 갔으며‘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이괄의 잔당은 후금으로 도망갔으며 후일 병자호란의 빌미를 제공하며 오늘날‘남한산성’이라는 소설과 영화가 탄생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다시 각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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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공신 중에‘원종공신’이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수여된 공신록이며 정공신, 친공신은 정조 때 수여된 것이고, 호성. 선무. 분공신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가 수여한 공신이며 나머지 개국이나 정사공신은 조선이 개국한 후 태조 이성계가 하사한 공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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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 역할론이 뜬다…’野안민석 저격 공천설’엔 劉 “불쾌“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26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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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 이 늠도 지 복 지가 걷어차는 늠이다. 여태 당과 대통령을 늦겨울 심산에서 갓 캔 암칡 씹듯 아니면 100% 핀랜드산 자일리톨 L사 껌 씹듯 하던 놈을 공을 세울 기회를 주려하는데 불쾌라니…??? 불쾌가 아니라 기분 좋아 낯 술 처마시고 불콰해 진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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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劉가늠 비판하기 전 또 다른 늬우스가 있더라고. 삽살개 정권 당시 법무부 장과 해 처먹었던 추가 계집이랑 비서실장 하며 군대도 안 간 놈이 철모 쓰고 아래 것들 데리고 전방 시찰한 임가 놈. 두 그렇고 그런 계집과 놈이 서로 싸운다는 늬우스.
웃기게도 두 인간이 공신을 서로 마다하며 싸운다는 것이다. 즉 윤석열 정권이 태동하게 된 개국공신 자리를 서로 양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 살다 살다 개국공신 자리를 양보하는 미더덕의 주인공이 나타났다니 개국공신도 별 거 아닌 시대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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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류가 늠 저늠은 또 왜 그러는가? 감지덕지(感之德之)라는 말도 모르나? 공손히 받아들이고 헛소리만 일관하는 안가 놈을 누르면 그야말로….개국공신은 아니더라도 정사공신(定社功臣)정도는 안 될까?
탈당은 않겠다며 또 공천신청도 않겠다며 그냥 공천 한 자리 주기만 바라는 놈이 자객 공ㅊㄴ을 받아들이고 공을 세우면 당 살고 대통령 살고 저 살 텐데….안타까워 해 보는 소리다.